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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간의 세계역사 (8월 셋째주)1999년8월 16일 대우그룹 채권단, 대우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 체결(사실상의 그룹해체) 자산기준 재계2위의 대우그룹이 30여년에 걸친 화려한 성장신화를 1999년 8월 16일부로 마감하게 됐다. 32년전 대우실업이라는 중소업체로 출발,한 세대안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벌그룹 중 하나로 부상한 대우그룹은 제3공화국이래 한국경제를 지배해왔던 성장모델의 상징적 존재였다.대우그룹 채권단은 이날 대우 계열사를 지난 6월 현재 25개사에서 연내에 6개사로 줄이는 대우 구조조정 방안을 확정, 대우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을 체결했다. 채권단은 매달 구조조정 실적을 점검,실적이 부진하면 담보주식을 처분하고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나 회사정리 절차에 넣는 등 강력하게 제재할 것이라고 밝혔다.채권단은 대우증권과 서울투신운용 대우전자 대우중공업 조선부문 등은 계열분리한 뒤 매각하기로 했다. (주)대우 건설부문은 계열분리 후 외자유치를 하거나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이에따라 대우그룹은 대우자동차 대우차판매 대우캐피탈 대우통신 자동차부품부문 등 자동차 관련 4개사와 자동차 해외판매를 맡을 (주)대우 무역부문, 대우중공업 기계부문 등 6개사로 축소됐다. 채권단은 수정약정에 각 계열사별 계열분리와 매각 시한을 명시하고 대우측이 이를 준수하지 못하면 현금화하기 쉬운 담보부터 처분하기로 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1976년 8월18일 오전 10시45분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유엔군측 제3초소 앞에서 한국인 노무자 5명이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고 있었다. 현장에는 미군장교 2명과 한국군 장교 1명을 포함, 모두 11명의 유엔군 장병들이 이들을 호위하고 있었다.이때 2명의 북한군 장교와 10여명의 북한군이 다가와 "나뭇가지를 치지말라"며 생트집을 잡았지만 여름만 되면 무성한 잎이 관측소 시야를 가로막아온 터라 미군장교는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강행했다. 그러자 곧 20여명의 북한군이 증원됐고 "죽여라"는 북한 장교의 고함과 함께 북한군은 곡괭이와 도끼 등을 유엔군에게 사정없이 휘둘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유엔군은 대항할 틈조차 없었다. 미군장교 2명을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도 중경상을 입힌 북한군은 유엔군 초소까지 부수고는 황급히 북쪽으로 도주했다.사건후 미국이 즉각 2개 전투비행단과 제7함대 기동부대를 한국으로 급파하자 위기감을 느낀 김일성이 각서로 유감의 뜻을 전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1919년 8월 21일 임시정부, 상해版 독립신문 창간우리 근·현대사에서 '독립신문'의 제호를 사용한 신문은 많다. 서재필과 개화파가 창간한 독립신문(1896년), 장기영 등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한 독립신문(1919년), 광복 후 서울에서 발간된 독립신문(1945년), 1919년 8월 21일에 임시정부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기관지로 발간한 '상해판(版) 독립신문' 등이다.'상해판 독립신문'은 상하이에 망명 중인 독립지사들이 자신들의 공동관심사와 독립운동 관련 소식을 모아 발행하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을 모태로 출발했다. 사장 겸 주필은 이광수가, 편집국장은 주요한이 맡아 타블로이드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주 3회 발행을 원칙으로 했다.상하이에 한글 활자가 없어 성경에서 한글을 오려내 자모를 만들 만큼 제작환경이 열악했지만 일제를 통렬하게 비판할 때는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재정난과 일제의 간접적인 탄압으로 1925년 9월,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할 때까지 '獨立' '獨立新聞' '독립신문'으로 제호가 3번 바뀌었다.1901년 8월 17일 서울시내 전등 시점식(始點式) 거행 1887년 우리나라 최초로 경복궁 건청궁에 전기가 점등된 이후로 1900년에 와서 민간점등이 시작됐다. 한성전기회사는 전등사업을 본격화하여 동대문발전소에 200KW 발전설비를 설치, 전차와 전등에 전력을 공급하게 됐다. 민간점등은 서울시내 전차의 야간운행을 위한 것이었다. 1901년 6월이 되면서 전등 보급이 더욱 확대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에는 일본인 상가가 밀집해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민간조명용 전등 600개가 보급된 것이다.정부의 고관대작, 외국사절, 상인을 비롯한 수많은 구경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치러진 진고개의 점등식은 서울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대한 이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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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정청사에 강익중 한글작품 걸린다미국 뉴욕에서 활동 중인 설치미술가 강익중(51)이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 한글작품을 기증한다.'대한민국 임시헌장'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주요내용을 가로 세로 1.5m 크기의 판에 한글 225자로 새겨 넣었다. 15일 광복절을 맞아 임시정부청사 1층 로비에 걸린다.강씨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한글로 새겨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선조의 정신이 평화로운 지구촌의 기둥이 됐으면 마음으로 작품을 제작했다"고 전했다.앞서 강씨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와 뉴욕 UN사무총장 관저, 충칭(重慶) 임시정부청사, 이라크 자이툰 도서관, 레바논 동명부대 관할지역 관청 등에 한글작품을 기증했다.5년 전부터 강씨와 함께 '한글 세계전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한국홍보 전문가 서경덕(37) 성신여대 객원교수는 "지난 6월 상하이임시정부 청사에 갔다가 한글작품이 있으면 좋겠다고 판단했다"며 "그 후 천안 독립기념관의 도움으로 이번 일이 성사됐다"고 밝혔다.이어 "우리의 목표는 전 세계 각 나라의 대표 건물에 한글작품을 하나씩 기증해 상설전시를 하는 것"이라며 "가을부터는 또 다른 국제기구 등 세계가 주목하는 주요건물에도 계속해서 도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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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재외동포문학상" 작품 공모- 시, 소설, 수필과 청소년부문(초등부와 중·고등부로구분) - 이민자의 삶을"자신만의 감수성, 독특한 관점"으로 창작해 내는 것이 중요한 의미 지녀 재외동포재단(이사장 권영건)은 '제13회 재외동포문학상' 작품 공모를 6월 10일부터 8월 10일까지 두 달간 시행한다. 재외동포재단은 재외동포의 한글 문학 창작활동을 장려하고, 청소년들에게는 한글 사용의 동기부여를 제공 하고자 지난 99년부터 재외동포문학상 공모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올해 재외동포문학상의 상금 규모는 총4,490만원이며, △성인부문은 시, 단편소설, 수필 3개 분야, △청소년 글짓기부문은 초등부와 중·고등부로 각각 나뉘어 공모한다. 응모작품 중 부문별 대상, 최우수상 등 총30편과 한글학교 2개교를 선정하고, 10 월 중순 재단 홈페이지(www.korean.net)를 통해서 결과를 발표한다. 한글문학 창작에 관심 있는 재외동포 성인 및 초·중·고등학생은 누구나 재외동포문학상 작품공모에 응모할 수 있지만, 사업 취지를 고려해 성인부문은 거주국 7년 이상, 청소년은 5년 이상체류자만 응모할 수 있도록 자격요건 을 강화했다 . 자세한사항은 재단홈페이지(www.korean.net)를 통해서 확인하고 온라인으로 응모 할 수 있다. "한국사람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긍지, 어린시절 추억과 친지에 대한 그리움, 다른 문화와 사회를 익히고 정착해가는 과정에서의 깨달음, 그리고 이방인으로서의 삶과 고독과 상처에 대한 것, 모두 좋은 주제라고 생각한다...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감수성,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이다... 이국에서 살아가는 더 많은 한국인들이글로써 자신을 표현하여 자아를 정돈하고 남과 소통할 뿐 아니라 한국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 2010년 수필부문 심사평 중에서 - 재외동포재단 권영건 이사장은 "고단한 이민의 삶을 창작활동을 통해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며, 우리 재외동포문학상을 통해 재외동포와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 제13회 '재외동포문학상' 작품 접수 안내 ᄋ 작품 접수기간 : 2011년 6월 10일(금) - 8월 10일(수) ᄋ 제출서류 : 재외동포 확인서류(여권사본 등), 작품, 참가 신청서- 작품접수서식 다운로드 및 자세한 사항 재단 홈페이지 www.korean.net 참조 ᄋ 접수방법- 온라인접수 : 재단 홈페이지 www.korean.net > 공지사항- 우편접수 : 서울시 서초구 서초2동 1376-1 외교센터 6층재외동포재단 교육문화팀 '재외동포문학상' 담당자 (우: 137-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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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한인여성회, 정관개편하고 강좌 늘여홍콩한인여성회(회장 김미리)는 그동안 자체적으로 사용해온 한글 정관을 점검하고 국제적인 단체로 탈바꿈하기 위해 투명성을 높인 정관으로 개정하기로 했다. 여성회는 지난 4월 28일 총영사관 5층 대회의실에서 가진 제10회 정기총회를 통해 정관개정에 대한 논의를 가졌다. 발제자로 나선 장은명 고문은 "작년도 회장 선출과정에서 현재 사용중인 정관의 부족한 점이 많이 발견됐다"면서 개정 취지를 밝히고 "유한회사인 'Limited'로 전환하면서 홍콩회사법(company law)에 따라 관행적인 표현이 많은 영문 정관을 작성했지만 실제적으로 사용하는 한글 정관과 차이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장은명 고문은 비교적 체계를 갖춘 미국여성회의 정관과 현재의 한글 정관, 영문정관을 모두 참고하여 법률사에 정식 신청해 최종 승인을 받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여성회는 현재 만다린과 광동어 등의 언어강좌를 시행중인데 새로운 학생들의 요구로 영어와 일어를 다시 개설할 예정이다. 또 와인클래스, 도자기공예, 가정상담세미나 등을 예정 중이며 홍콩인들을 위한 쿠킹스쿨 강좌에 협력해 한식을 알리는데 일조하기로 했다. 글 손정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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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와 일본 승려 엔닌엔닌 일기 9세기 동아시아 국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일본인이 있다. 승려 엔닌(円仁)이다. 그는 중국에 유학한 일본의 유학승이지만 9년간의 중국생활에서 신라인으로 해상왕 장보고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가 만년 주지로 있던 일본 히에잔(比叡山) 연력사(延曆寺)에는 장보고를 칭송하는 기념비가 한글로 새겨져 있다. 엔닌은 일본 九州 하카타를 떠나 9년간 중국 체재 동안의 행적을 일기로 썼다.“入唐求法巡礼行記”라는 기록이다. 물론 한문으로 쓰여 있다. 이것을 서양학자로서 처음 세상에 알린 사람이 바로 “라이샤워” 하버드대학 교수다. 그는 후에 주일대사를 지낸 분이다. 라이샤워교수는 1955년 상기 “입당구법순례행기”를 “Ennin's Diary"라는 제목으로 영역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로서 사람들은 엔닌의 일기를 통해 9세기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를 알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의 일기에는 많은 부분이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시 통일신라는 일본과 적대관계였다. 일본이 백제와의 특수 관계로 羅唐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병력 27,000명, 군함 400척을 보내 백제지원에 나섰다. 역사에서는 白村江전투라 하여 지금의 錦江河口에 일본 원정군이 도착하였지만 아깝게도 때가 늦었다. 이미 백제는 망한 후라 일본은 결국 많은 병력을 잃고 백제유민 귀족을 데리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의 재건을 노리는 백제왕족의 후예들의 망명정부가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신라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해상왕 장보고 [[1[[ 이 무렵 신분은 낮았으나 완도 인근의 작은 섬 출신의 장보고가 이러한 신라와 일본과의 公貿易의 단절된 틈을 타서 私무역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이 좋아하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공급해 주었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도자기의 수요가 높아지자 아예 전라남도 강진 등에 도자기 가마를 만들어 놓고 중국과 비슷한 도자기를 구워 공급하기도 하였다. 그의 무역선은 물건뿐 아니라 사람들의 왕래도 담당하였다. 장보고는 중국에서도 세력을 펼쳤다. 중국에서 武藝로 인정받아 중국으로부터 산동성 신라방(신라인의 居留地)의 지배권을 갖게 되자 신라는 그에게 신라방의 보호를 요청하게 되었다. 완도 즉, 청해진大使가 그의 공식직함이었다. 엔닌의 일기에는 중국의 운하에서 장보고의 선단의 활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라방 ]]2]] 엔닌은 일본의 下野國(지금의 도치기현)의 즈카고리(都賀郡) 출신이다. 그 무렵 일본의 수도 平安京에 멀지 않은 히에잔의 연력사 젊은 스님으로 당시 유행하던 인도의 密敎의 본질 연구를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하카다(博多)에서 배를 타고 중국 揚州로 갔다. 양주 도착 조금 전에 풍랑을 만났으나 838년 7월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인구 80만의 국제도시 양주의 開元寺에 체재하면서 天台宗의 본산 天台山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중국 관청으로부터 여행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부득불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長安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본유학승 일행과 함께 귀국을 위해 산동성으로 갔다. 그 당시 귀국하는 일본사람들은 산동성 赤山의 신라방에서 출발하는 장보고의 선편을 주로 이용하였다. 산동성 赤山 출발, 한반도 서해안에 도착, 해안을 따라 남하 청해진(완도)을 거쳐 하카다로 돌아가는 해로였다. 赤山에 도착한 엔닌은 그냥 배를 타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허탈하였다. 그의 사정을 들은 신라인이 赤山교외의 장보고가 운영하는 法華院이라는 절에 남도록 하였다. 6개월 동안 그 절에서 수많은 신라인과 접촉한 엔닌은 天台山이 아니라면 山西省의 五台山으로 가는 것을 생각했다. 물론 여행허가서가 필수지만 신라인이 커넥션으로 가능하다고 믿게 됐다. 엔닌은 본국에서 장보고 선단을 통해 송금되어 온 路資로 여행에 나섰다. 보디가드 겸 2명의 젊은이를 제자로 동반하였다. 오대산까지는 1100km의 거리였다. 하루 30-40km 걷는다 해도 한 달 이상의 거리지만 여행허가서의 유효지역이 좁아 새로운 지방으로 옮기게 되면 새로운 여행허가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여행허가서를 받는 데는 10일 이상 소요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리가 결재해야 하는데 보통 不在中이고 해서 타이밍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엔닌의 五台山 엔닌의 도보여행 경로는 산동반도의 동쪽 끝 赤山에서 내륙으로 들어와 青州로 간다. 산동성의 중심이기도 한 青州는 당시 인구 90만의 대도시였다. 그리고 황하를 건너 하북성으로 들어간다. 그의 일기에 나오는 지명과 숙박했던 사찰의 이름은 1000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에서 그대로 쓰고 있고 사찰은 전란으로 불타거나 유적일부만 남아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사찰에서 며칠씩 체재할 경우 대개 사찰내 신라승려의 숙소였던 신라원에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唐나라에서는 불교국가의 동남아 여러나라 사람들이 성지순례 여행하고 사찰에 숙박할 경우 국가와 민족에 따라 숙소를 구분했는지 모른다. 엔닌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반년간 赤山에서 신라말도 배워서인지 신라원에서 신라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엔닌 일행은 하북성을 통하여 태행산맥을 넘는다. 지금의 하북성 성도 石家莊을 통하여 태행산맥을 넘어 북상하면 五台山이 나온다. 산서성이라고 불리워지는 고원지대는 평야인 하북성과 다르다. 평균 해발 2000m정도이며 오대산의 최고봉이 3058m이지만 현지에서 보면 그렇게 높게 보이지 않는다. 본래 山西省이란 뜻은 태행산맥의 서쪽이라는 뜻이고 山東省은 태행산맥의 동쪽이라고도 하고 또는 태산의 동쪽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만큼 2000m이상의 높은산이 산서성과 하북성을 경계로 하고 있다. 엔닌이 찾아간 五台山은 5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곳으로 불교의 성지였다. 문주사리(文珠舍利)보살을 숭배하고 있으며 오대산에는 한 때 400개의 탑이 있었으며 47개의 寺院이 있었다고 한다.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唐시대의 오대산 그림에는 불교성지로서 당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3000m에 가까운 5개의 산봉우리 속에 분지처럼 된 곳이 台懷鎭인데 곳곳이 사찰이다. 문화혁명으로 한때 종교활동이 금지된 바 있지만 지금은 옛날처럼 불교의 사찰이 즐비하고 많은 스님들이 불경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密敎 전래 엔닌 일행은 五台山의 竹林寺에 머물면서 일본에는 없는 불경을 傳寫하거나 고승들과 불교에 대한 담화를 통해 공부한다. 약 1개월간 체재 후 1800km 떨어진 수도 장안을 향하여 다시 출발한다. 五台山에서 공부하면서 역시 首都 장안을 가야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오대산을 출발 남하하면 산서성의 수도인 太原에 도착한다. 지금도 산서성에는 석탄광이 많지만 1200년전 엔닌의 일기에도 太原에 火力이 센 석탄이야기가 나온다. 황하가 남하하다가 동쪽으로 거의 직각으로 꺾이는 龍門폭포를 거쳐 서쪽으로 계속 나가면 長安에 이르게 된다. 걷는 시간만 51일간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안은 당시 세계 제일의 국제도시로 규모도 지금의 서안의 7배에 가까웠다. 모든 세계의 각종 종교는 모두 장안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중국에는 고유의 종교 道敎가 있었지만 외래종교로는 불교와 함께 기독교 계통의 景敎, 페르시아의 마니교, 배화교, 이슬람교 등이 들어와 있었다. 엔닌은 5년간 資聖寺라는 절에서 숙식을 하면서 밀교에 대한 공부를 하며 지냈다. 당시 唐의 황제인 武宗은 중국 古來의 종교 도교를 중시하고 外來종교인 佛敎를 배척하였다. 이는 외래종교 佛敎가 힘을 얻어 신도를 많이 확보하고 있음에 왕권의 위협을 느꼈는지 모른다. 武宗은 승려의 환속을 명령하고 사찰을 폐지하면서 불상도 파기하였다. 그리고 사찰에는 최고 30인만 기거하도록 제도화 하였다. 당시 사찰 4600개가 폐사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가 상당히 전국적으로 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외국에서 온 유학승의 국외추방을 명령하였다. 무종武宗의 이러한 불교탄압에 승려들은 지하로 들어가고 만다. 엔닌 등 일본유학승은 귀국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入唐求法巡行記와 “東方見聞錄” [[3[[ 엔닌의 일기에는 845년 5월 사회적 배불운동에 승려 신분임에도 일반인의 복장으로 바꾸고 강소성 양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唐의 불교 특히 밀교신자들은 엔닌이 밀교를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일본에서 꽃을 피우도록 간절히 빌기도 하였다. 도중 낙양에 도착한 엔닌은 수일간 체재하였다가 개봉에서 운하를 오르내리는 배를 타고 양주로 간다. 양주에서 다시 신라인의 배가 많은 산동성 赤山으로 간다. 그곳에서 신라인의 도움으로 장보고 선단을 이용, 한반도 서해안에 도착, 서해안을 따라 남하, 남해에서 九州 하카타에 도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배에는 신라인 등 44인이 승선하였다 하니 장보고의 무역거점 청해진을 경유하였음이 틀림없는 것 같다. 엔닌은 중국에서의 9년 3개월간의 일기로 기록되어 있다. 入唐求法巡行記라는 그의 일기에는 불교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당시 唐의 사회상, 신라인의 활약상 등이 잘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그의 일기는 마르크폴로의 “東方見聞錄”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학자도 있다. 그가 864년 죽을 때까지 히에잔 연력사에 최고 승려로 慈覺大師의 칭호를 받았다. 엔닌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인으로 동아시아의 교양을 갖고 선진국민인 중국인과 신라인과의 교류는 오늘날 동북아시아 중심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중국과 일본을 연결시키는 좋은 선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유주열(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칼럼니스트 유주열의 『홍콩,중국,일본 문화기행』이 푸른사상사를 통해 발간되어 있으므로 이 책에 관심있으신 분은 연락바랍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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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우(相撲) 이야기 下쥬료우(十兩)의 의미 十兩가 되면 力士로서 일본 전국랭킹이 66위 이내에 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세키도리의 현재 정원이 66명이고 그중 마쿠노우치(幕內)가 40명, 十兩가 26명이다. 세키도리중 정말 프로로 스모우를 하는 사람은 幕內로 그곳에는 요코즈나(橫綱), 오오제키(大關) 등이 있다. 幕內라는 뜻은 江戶시대 쇼군이 친히 스모우를 관람할 때는 쇼군과 같은 幕內에 있었던 力士를 말하고 당시 十兩는 幕內에 없었다고 한다. 일본 전국에 그 많은 部屋가 있지만 十兩를 배출하고 있는 部屋는 몇 개 안되는 것으로도 잘 나타나고 있다. 部屋에서 十兩가 탄생되면 대단한 경사가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김성택이 소속한 春日山部屋에도 수십명의 스모우도리가 있지만 지난 6年間 十兩 한 사람 배출하지 못하였다. 김성택은 十兩로 승진하기 전 序口→序二段→序三段→幕下 등 일반적으로 토리테키(取的)라고 부르는 4단계 力士 養成過程을 거쳐 드디어 일본 스모우협회의 十兩 승진심사에서 十兩로 결정된 것이다. 그것이 지난 5月이므로 마침 월드컵 공동개최로 한일간 친선무드가 고조되었을 때였다. 한일 월드컵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7월초, 나고야의 아이치현체육관에서 개최되는 나고야 스모우대회(나고야바쇼 : 名古屋場所)에 十兩로서 첫 줄전하게 된다. 十兩가 되면 직업군인이 별을 다는 것이나 바둑에서 프로로 입단하는 것과 유사한 대우를 해준다고 한다. 스모우협회에서 고정적 월급을 준다. 또한 스모우도리가 꿈에도 그리는 케쇼마와시(化粧廻し)를 할 수 있다. 이것은 스모우도리가 앞치마처럼 앞을 가리는 것인데 그것이 핸드메이드로 금실로 수를 놓고 상징되는 그림과 금줄 등으로 그 품위가 하나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가격도 우리돈 천만원 가까이 든다고 한다. 스모우 시합전에 十兩 이상의 세키도리가 모두 나와서 土俵에 올라가 원을 그리면서 각자 특징있는 케쇼마와시를 선보이고 깨끗이 머리를 빚어 상투를 메고 그 앞에 큰 은행잎을 붙여놓은 듯한 머리모양으로 관중앞에 나타나면 모두가 열렬히 환영을 한다. 이렇게 盛裝을 하고 관중앞에 나설 수 있는 十兩로 승진될 경우 후원회가 조직되어 十兩를 본격적으로 키워 나간다고 한다. 김성택군이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 성공의 해, 한일 국민교류의 해에 대한민국 사람으로서는 일본 스모우 역사에서 첫 十兩가 되었다. 그의 스모우 이름도 오야카타 春日山를 따서 春日王(카스가오)라고 지었다. 山에서 王이 나왔다는 뜻도 되고, 일본 스모우계의 大王이 되라는 기원도 들어있다. 그의 케쇼마와시에 태극기와 일본기를 X형으로 걸어 한일 친선의 상징을 표시하였다. 春日王 옆에는 한글로 “카스가오”라고 표기까지 했다. “카스가오(春日王) 요코즈나(橫綱)로 승진되다” 일본은 1년중 1월, 3월, 5월, 7월, 9월, 11월 등 홀수인 달에 동경과 지방(나고야, 오오사카, 후쿠오카)으로 나누어 각각 15일간 스모우 시합(場所)을 한다. 시기 및 개최장소 등의 이름을 따서 1월을 하츠바쇼(初場所), 3월을 하루바쇼(春場所) 또는 오오사카바쇼, 5월을 나츠바쇼(夏場所), 7월을 나고야바쇼(名古屋場所), 9월을 아키바쇼(秋場所 : 동경), 11월을 큐슈바쇼(九州場所 : 후쿠오카)라고 부른다. 春日王는 지난 15일간 나고야바쇼에서 8승 7패의 기록으로 승자, 즉 카치코시(勝越)가 되었으므로 당분간 프로 力士로서 가을의 東京바쇼(場所) 등에 출전하게 된다. 김성택은 스모우를 늦게 시작한 감이 없지 않으나 아직 나이가 젊고(24세) 월드컵 4강 진출에서 보여준 바와 같은 한국인의 끈질긴 투혼을 발휘하면 머지않아 幕內가 될 것으로 본다. 幕內에는 40명의 幕內力士가 있는데 요코즈나 이외 오오제키(大關), 세키와케(關脇), 코무스비(小結)의 三役力士가 버티고 있다. 幕內로 승진하면 이러한 일본 스모우 일류들과 힘을 겨루게 된다. 최후로 요코즈나가 되어야 일본 스모우계를 평정하게 된다. 요코즈나가 되면 일본 사무라이처럼 “칼”을 가진 사람이 항상 뒤를 따른다. 이는 옛날에 평민이 스모우로 요코즈나가 되면 사무라이 같은 지배계급으로 신분상승을 시켜준 데 기인한다고 한다. 언젠가 “카스가오 요코즈나로 승진되다”라는 큰 타이틀의 신문기사를 읽고싶다. 일본 스모우계도 당초는 일본인 전유물로 되어 왔다가 20년전부터 스모우계의 국제화, 또는 비지니스를 고려해서인지 외국인 선수가 진출하고 있다. 미국, 주로 하와이 출신의 거구들이다. 하와이 출신의 거구 몇 사람은 이미 요코즈나로까지 출세하였다. 지금 현역의 무사시노마루(武藏丸)도 하와이 출신의 미국인이다. 다음으로 많은 국가는 몽골이다. 몽골공화국의 수도, 울란바트로 출신이 많다. 몽고에도 전통적으로 씨름이 있었다. 초원에서 몽골 씨름을 보면 몽골, 우리나라, 일본 씨름의 발생지가 동일한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몽골 선수들은 조기유학으로 어릴 때부터 일본 스모우 部屋에 등록하여 스모우를 배운다고 한다. 朝靑龍이라는 몽골 스모우 선수는 15세때 일본에 온 스모우 조기유학생으로 징기츠칸의 후예답게 다부진 몸매에 동작이 아주 빠르다. 이번 나고야바쇼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양하여 오오제키로 승진될 것 같다. 앞으로 요코즈나로도 승진 가능성이 높다. 朝靑龍의 후배로 이번에 春日王와 같이 新十兩로 승진한 朝赤龍도 이번 나고야바쇼에서는 성적이 좋지않았지만 장래가 촉망된다고 한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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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훈 변호사] 신라의 달밤 [상표법편]Q 저희가 '용수성(가칭)'이라는 이름으로 홍콩에 갈비집을 차린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에서 이름난 '용수성'의 주인은 홍콩에서도 성공하고 싶은 욕심에 홍콩변호사를 선임하여 저희를 상대로 상호, 상표 가처분 신청을 하겠다고 합니다. 서울 측이 승소가능성이 있는지요. A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상표는 설사 타국에 등록되어 있지 않더라도 유명하다는 것을 입증하면 상표에 관련된 파리조약에 의해 보호를 받습니다. 요즈음은 지적재산권에 대한 지식이 늘어 유명할 것 같은 브랜드를 갖고 있는 회사는 무조건 세계각국 시장에 상표를 등록해 버립니다. 큰비용이 들지 않기에 유명해지지 않는다 해도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한때 가난할 때, 한국인들은 외국브랜드 이름을 선 등록한 후 외국회사가 진출하면 미화 몇 만 달러 씩 뜯어먹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외국회사는 송사로 해결할 수도 있었으나 비용이 들기는 마찬가지이므로 차라리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 돈이 그 돈이라는 결론으로 한국인들에게 돈을 내주고 상표권을 건네 받았습니다. 지금 이런 현상이 중국 등 후진국에서 벌어지고 있으나, 일단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이면 선 등록자라고 해도 1년 이상 사용하지 않았으면 권리가 없어집니다. '용수성'이라는 상호상표는 국제적으로 유명하다고 볼 수 없으므로 한국의 '용수성' 주인이 홍콩에 미리 등록해 놓지 않았다면 홍콩의 '용수성' 주인에게 승소할 수 없습니다. 필자가 담당했던 상표사건 중에 유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S호텔 내에 S라는 식당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큰 호텔이지만 S라는 식당상호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과거 왕국의 수도이름이기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단어가 되었음에도 상호상표 등록을 했기에 한국에서는 당연히 타인이 그 이름을 사용하면 상호상표권 침해가 되는 것입니다. 홍콩의 S식당이 사업이 잘 되자 S호텔사장은 상호상표 가처분 신청을 시도했으나 '용수성'과 같은 이유로 패소하고 말았습니다. 머리 좋은 홍콩 S식당의 주인은 "S"라는 이름이 대한민국에서 수없이 사용된다는 증거로 전국주요도시의 전화번호부를 증거로 내세웠습니다. 식당뿐만 아니라 여관, 당구장, 가라오케 등 수많은 영업인들이 사용하는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설사 상표등록이 안되었다고는 해도, "S"라는 한자명이 다르고 로고(logo)도 달랐습니다. 그 동안 TV 신문 잡지 등을 통해 그 이름이 유명해졌을 때 S호텔은 그 한글이름만이 같다는 이유 만으로 되찾겠다고 했으나 법원에서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설사 "S"라는 이름이 세계적으로 유명했다해도 실제 "S"가 유명하도록 한 장본인은 S호텔 주인이 아니라 홍콩의 S식당 주인이었기에 상표법에서뿐만 아니라 형평원칙에도 홍콩 측이 우세했습니다. 오재훈 변호사 ejho@mail.hklawsoc.org.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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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훈 변호사] 내 돈 내놔 [민사소송법]Q H씨는 과거 모 한인 단체 임원을 했다고 서울에 가서 큰소리 쳐 사업 동업자 김씨에게서 US$10만의 사업자금을 얻어와서 홍콩에서 이것저것 시도하다 돈만 다 날리고 계획했던 사업은 무산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김씨는 H씨를 상대로 서울 민사지방법원에 소를 걸어 소장이 홍콩총영사관을 통해 H씨에게 송달되었는데 이런 송달이 유효한지요? A 대한민국 법원의 소장 송달은 대한민국 민사소송법 제 176-182조에 의거해 절차를 밝으면 한국법원의 서류가 제대로 전달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피고가 홍콩에 있으므로 서울지방법원의 판사는 직접 홍콩주재 대한민국 영사에 소위 '촉탁서'를 소장과 함께 보내 소장을 피고에게 송달해달라고 부탁 한 후 송달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서울지방법원으로 송부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홍콩주재 영사는 모든 서류를 홍콩의 피고 거주지에 보내고 피고로부터 송달을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면 서울지방법원 판사에게 소위 '송달보고서'를 보냅니다. 이런 경로를 다 거쳤는데도 피고가 지정된 기일 재판에 이유 없이 안 나타나면 궐석판결을 받아 패소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만약 피고의 주소가 달라졌거나 수취인이 거절하면 홍콩주재 영사는 그 사실을 서울지방법원 판사에 보고하여야 합니다. 여차한 이유이든 간에 수취가 된 것이 확인이 안 되면 재판 자체도 연기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소장이 우편으로 오면 요리 조리 피하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 코 앞에서 직접 교부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모든 서류는 한글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글을 모르는 제 3국가인에게 송달할 때는 소장 및 관련된 서류를 그 나라 언어로 번역해서 원문과 번역문을 동시에 송달하여야 합니다. 만약 피고가 기술적으로 소장을 계속 회피하면 서울 지방법원 판사는 홍콩주재 총영사관에 다시 촉탁해서 신문에 공고를 내는 소위 "공시 송달" 제도를 이용할 수 있으므로 피고가 끝까지 소장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홍콩의 소장이 한국으로 송달되는 절차는 전편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민사소송법 상 한국에서 홍콩으로 송달되는 절차가 그 반대인 경우보다 훨씬 더 수월합니다. 칼럼니스트 오재훈 변호사 ejho@mail.hklawsoc.org.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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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한글학교 교사동정2010학년도를 마지막으로 황현숙 교사, 조서연 교사, 유정희 교사, 이미경 교사가 사직하였고, 2011학년도에는 유치반 3개, 유아반 1개반으로 유치반 1개반을 추가 신설했습니다. 신임교사 명단 ■ 유치3반 조현영 교사, 윤정민 보조교사■ 초등1-1 김희경 교사, 초등 1-2 현정옥 교사■ 초등 3-1 장성희 교사, 초등 6-1 신경미 교사 금년부터 33분의 교사와 560여명의 학생으로 홍콩한국토요학교가 학부모님들의 관심과 성원으로 많은발전을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보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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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정치홍콩의 정치 제도는 대체로 영국이 통치했을 때의 정치, 입법, 사법을 답습했고 서로 예속되지는 않았다. 특구 성립 후에도, 여러 가지 정치 제도는 중국 대륙과 전혀 다르게 유지되었다. 현법 제도성 문서 《기본법》은 덩샤오핑(등소평)이 구상한 일국 양제의 이념을 확실히 보장하고 있고, 정치 정신과 사법의 독립을 얻어 북경의 중앙 정부의 관여를 받지 않는다. “홍콩 사람이 홍콩을 다스리고, 고도의 자치를 한다” 라는 원칙을 따르는 것과 외에, 홍콩은 계속 국방 및 외교, 기타의 자신의 사무를 관리한다. 홍콩은 “중국 홍콩”의 명칭을 사용하고, 계속 국제 사회에 참여하고, 세계무역기구에 참가하고, 올림픽에 참여하였다. 홍콩 특구, 중국 및 영국 정부는 누차 1997년 후에 일국 양제의 실현할 것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홍콩 내외의 정치인 및 여론, 일국 양제를 질의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예를 들면, 파룬궁(법륜공)이 홍콩에서 공개 활동하고, 북경에서 홍콩의 보통 선거를 쟁취하려는 모습들이 보이고, 홍콩 정치인물이 중국 제도에 대한 의견을 공개 발표하고, 2007년 행정 장관 입후보자 양가걸[통용](중국어 정체: 梁家傑)은 중앙 정부에서 특구 관원 임명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을 제기하는 등,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질의하게 하는 것은 “일국 양제(중국어 정체: 一國兩制), 우물물은 강물을 범하지 않는다(각자 한계를 분명히 하여 서로 범하지 않는다.).” 라는 사안이었다. 정치 제도 개혁 2007년 입법회 및 2008년 행정 장관 선출 방법은 자문, 토론 및 "전국 인민 대표 회의"에서 법을 공포를 거친 후에, 2004년 4월 26일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는 2007년 및 2008년에 전면 보통 선거를 실행하지 않을 것을 선포하였지만 결국 보통 선거를 할 것을 승낙하였다. 2004년 5월, 정경한[통용](중국어 정체: 鄭經翰), 황육민[통용](중국어 정체: 黃毓民) 및 이붕비[통용](중국어 정체: 李鵬飛)는 각자 자신이 사회자로 있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언론에서 압박을 받는다고 잇달아 발표하였다. 2005년 정부는 “정부 제도 발전에 대한 책임 소재를 밝히는 팀의 제5호 보고서(중국어 정체: 政制發展專責小組第五號報告)”를 내놓았지만 민주파 의원에 의해서 비판 받았고, 민주파 의원은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의안은 최종적으로 2/3의 표를 넘지 못했기 때문에, 통과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