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간의 세계역사 (8월 셋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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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간의 세계역사 (8월 셋째주)




1999년8월 16일 대우그룹 채권단, 대우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 체결(사실상의 그룹해체)

자산기준 재계2위의 대우그룹이 30여년에 걸친 화려한 성장신화를 1999년 8월 16일부로 마감하게 됐다.

32년전 대우실업이라는 중소업체로 출발,한 세대안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벌그룹 중 하나로 부상한 대우그룹은 제3공화국이래 한국경제를 지배해왔던 성장모델의 상징적 존재였다.

대우그룹 채권단은 이날 대우 계열사를 지난 6월 현재 25개사에서 연내에 6개사로 줄이는 대우 구조조정 방안을 확정, 대우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을 체결했다.

채권단은 매달 구조조정 실적을 점검,실적이 부진하면 담보주식을 처분하고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나 회사정리 절차에 넣는 등 강력하게 제재할 것이라고 밝혔다.

채권단은 대우증권과 서울투신운용 대우전자 대우중공업 조선부문 등은 계열분리한 뒤 매각하기로 했다.


(주)대우 건설부문은 계열분리 후 외자유치를 하거나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이에따라 대우그룹은 대우자동차 대우차판매 대우캐피탈 대우통신 자동차부품부문 등 자동차 관련 4개사와 자동차 해외판매를 맡을 (주)대우 무역부문, 대우중공업 기계부문 등 6개사로 축소됐다.

채권단은 수정약정에 각 계열사별 계열분리와 매각 시한을 명시하고 대우측이 이를 준수하지 못하면 현금화하기 쉬운 담보부터 처분하기로 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6년 8월18일 오전 10시45분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유엔군측 제3초소 앞에서 한국인 노무자 5명이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고 있었다.
 
현장에는 미군장교 2명과 한국군 장교 1명을 포함, 모두 11명의 유엔군 장병들이 이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이때 2명의 북한군 장교와 10여명의 북한군이 다가와 "나뭇가지를 치지말라"며 생트집을 잡았지만 여름만 되면 무성한 잎이 관측소 시야를 가로막아온 터라 미군장교는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강행했다.

그러자 곧 20여명의 북한군이 증원됐고 "죽여라"는 북한 장교의 고함과 함께 북한군은 곡괭이와 도끼 등을 유엔군에게 사정없이 휘둘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유엔군은 대항할 틈조차 없었다. 미군장교 2명을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도 중경상을 입힌 북한군은 유엔군 초소까지 부수고는 황급히 북쪽으로 도주했다.

사건후 미국이 즉각 2개 전투비행단과 제7함대 기동부대를 한국으로 급파하자 위기감을 느낀 김일성이 각서로 유감의 뜻을 전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1919년 8월 21일 임시정부, 상해版 독립신문 창간

우리 근·현대사에서 '독립신문'의 제호를 사용한 신문은 많다.

서재필과 개화파가 창간한 독립신문(1896년), 장기영 등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한 독립신문(1919년), 광복 후 서울에서 발간된 독립신문(1945년), 1919년 8월 21일에 임시정부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기관지로 발간한 '상해판(版) 독립신문' 등이다.

'상해판 독립신문'은 상하이에 망명 중인 독립지사들이 자신들의 공동관심사와 독립운동 관련 소식을 모아 발행하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을 모태로 출발했다.
 
사장 겸 주필은 이광수가, 편집국장은 주요한이 맡아 타블로이드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주 3회 발행을 원칙으로 했다.

상하이에 한글 활자가 없어 성경에서 한글을 오려내 자모를 만들 만큼 제작환경이 열악했지만 일제를 통렬하게 비판할 때는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재정난과 일제의 간접적인 탄압으로 1925년 9월,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할 때까지 '獨立' '獨立新聞' '독립신문'으로 제호가 3번 바뀌었다.


1901년 8월 17일 서울시내 전등 시점식(始點式) 거행

1887년 우리나라 최초로 경복궁 건청궁에 전기가 점등된 이후로 1900년에 와서 민간점등이 시작됐다.

한성전기회사는 전등사업을 본격화하여 동대문발전소에 200KW 발전설비를 설치, 전차와 전등에 전력을 공급하게 됐다.

민간점등은 서울시내 전차의 야간운행을 위한 것이었다.

1901년 6월이 되면서 전등 보급이 더욱 확대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에는 일본인 상가가 밀집해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민간조명용 전등 600개가 보급된 것이다.

정부의 고관대작, 외국사절, 상인을 비롯한 수많은 구경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치러진 진고개의 점등식은 서울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대한 이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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