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 여행, 이건 알고 가자~ (1) - [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선전 여행, 이건 알고 가자~ (1) - [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최근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홍콩 교민의 선전행이 잦아지고 있다. 이것은 홍콩 현지인들도 마찬가지다. 고속철로 불과 십여 분 남짓한 거리에 홍콩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가격과 서비스, 상품의 다양성 등에서 선전은 홍콩 대비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 선전을 방문하며 이 도시에 대해 궁금증을 품어본 적은 없는가?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도시가 된 선전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는가 하는 것이다. 선전 발전의 배경을 알고 가면 도시가 다르게 보일뿐더러 지인에게 할 얘기도 많아진다. 이에 선전의 성장 배경을 알아보는 지식 교양 시간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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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의 발전과 경험은 우리가 경제특구를 설립한 정책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선전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인 리엔화산(연화산) 공원에는 중국 개혁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선전의 발전과 경험은 우리가 경제특구를 설립한 정책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深圳的发展和  经验证明,我们建立经济特区的政策是正确的)."

리엔화산 공원을 다녀온 우리 학원의 중국어반 수강생 한 명도 이 글의 뜻을 물어본 적이 있다. 선전과 덩샤오핑은 무슨 관계가 있길래 그의 동상이 주요 공원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위의 문구는 어떤 배경으로 쓰여졌을까?


개혁개방 전의 선전

선전의 현대사는 크게 1978년 전후로 구분된다. 1978년은 중국의 개혁 개방이 발표된 해이다. 개혁개방 이전의 선전은 주로 어업에 의존하는 인구 3만 명의 작은 마을이었다. 선전의 ‘전(圳)’은 광동어 방언으로 '도랑'을 뜻한다. 그 이름처럼 수로가 많은 소박한 농어촌이었다. 현지 주민은 농업과 어업 및 소규모 산업에 주로 종사했다. 지역 단위 생산 형태가 특징이었다. 근현대사 이전에는 홍콩과 같은 행정구역에 편입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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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의 산업 기반은 198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드문드문 공장과 작업장이 있었지만 규모가 작고 기술적으로도 낙후되어 지역 경제를 든든하게 지탱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선전은 지리적으로 외진 곳에 위치하여 교통 및 통신 여건이 열악했고, 이는 경제 발전을 더욱 저해했다. 수산물와 소비재 등 단순 유통 비중이 컸다. 

 

또한 선전은 홍콩과 맞닿아 있어 밀수 무역, 비공식 교역이 활발했다. 홍콩으로 밀입국하는 주요 경로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별볼일 없던 선전은 개혁개방 발표 후인 1979년 시로 승격되며 대도약의 기회를 맞이한다. 


덩샤오핑의 복권, 개혁개방 실용주의 노선 선언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같은 해 10월 4인방이 실각하며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린다. 중국을 암흑의 20년으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은 경제에 있어서도 처참한 흔적을 남겼다. 오로지 사회주의 이념에 매몰되어 자급자족 형태의 낙후된 상황에 발목이 잡혀 파탄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물이 덩샤오핑이다. 그는 주자파(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자)로 마오쩌둥과 4인방의 눈밖에 나 실각한 상태였다. 장시성 난창의 한 트랙터 수리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이 끝을 향해 내닫는 시점, 당 원로들의 강력한 입김으로 중앙에 복귀한다. 두 번의 실각을 거치며 세번째로 복귀한 덩샤오핑은 ‘부따오웡(오뚜기)’라를 별명을 달며 실권을 장악하였다. 경제 살리기에 우선 순위를 둔 덩샤오핑은 복귀 이듬해인 1978년 12월, 제11기 3중전회를 통해 개혁개방을 발표하며 중국은 실용주의 노선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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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중국 최초의 경제 특구로 날개를 단 선전

중국이 개혁개방을 본격화하던 흐름 속에서 1980년을 전후해 경제 특구 네 곳이 지정된다. 중국의 전 지역을 일시에 개방하기에는 너무나 큰 부담이 있었기에, 시험적 성격의 특구를 제정한 것이다. 최초의 경제특구로 선정된 도시는 광동성의 선전, 주하이, 샨터우와 푸지엔성의 샤먼이었다. 광동을 서서히 열고, 성과가 나오면 더 넓게 확산한다는 전략의 구체적 형태였다.

 

이들은 모두 중국 남부의 연해 도시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그런데 선정 이유에는 중요한 의도가 공유되어 있었다. 바로 화교 자본 유치이다. 선전은 홍콩과, 주하이는 마카오와, 샤먼은 대만과 인근해 있다. 샨터우는 5백 만 화교의 고향이었다. 해외에 퍼져 있는 화교들에게 중화권 공동체 의식을 호소하여 투자를 유치하고자 함이었다. 선전 역시 홍콩이라는 이웃을 잘 둔 덕에 대박을 터뜨릴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경제 특구는 단순히 세금을 깎아주는 사업장 수준이 아니라, 행정•제도•투자•대외무역•노동 및 시장 운영 방식을 비교적 유연하게 적용해 자본과 기술이 들어오면 어떤 효과가 나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즉, 계획 경제 중심 체제에서 시장 경제를 도입하는 실험을 하되, 실패 위험은 상대적으로 제한된 범위에서 통제하려는 목적이 컸다. 그래서 일부 지역에서 먼저 시험하고, 성과가 확인되면 확장하는 방식을 취하고자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순탄히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경제학자 출신 지도자 천윈은 새장경제론을 들고 나오며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에 제동을 걸고자 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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