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신계의 독특한 주택 양식, 웨이촌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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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신계의 독특한 주택 양식, 웨이촌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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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처럼 지은 웨이촌

 

신계 지역을 방문하면 독특한 주택 양식으로 이루어진 마을 몇 곳을 지나게 된다. 집의 담벼락이 마치 작은 성처럼 둘러쌓여 있는 집들이다. 

 

이것은 ‘웨이촌’(圍村, 광동어 발음 ‘와이췬’)이라 불리우는 가옥 형태로, 외부인의 침입을 막고 씨족 문화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웨이촌은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웨이촌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한반도의 고려 시대와 동시대인 남송 말기와 연결된다. 명나라 시기(1368~1644)에는 해적들의 출몰이 빈번했는데, 남하를 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지키기 위해 웨이촌을 형성하여 기거했다. 

 

웨이촌의 역사는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에 와서도 유지, 계승된다. 청나라 초기에 광동과 복건의 해안 마을에는 해금령이 선포된다. 중국 연안의 마을 사람들이 대만에 있는 명나라 정성공의 세력과 결탁해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한 청나라는 해금령을 시행하여 해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주시켰다. 

 

1669년 이후 마을을 떠난 주민들은 다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으나 해안 지역은 해적 소굴로 변해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담을 작은 성곽처럼 두르고 입구에는 철문을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다. 

 

그리고 웨이촌은 18~19세기에 이르러 번성하였다. 마을 대부분이 농경 사회로서 외곽에 위치한 바, 관청의 보호가 미치지 못해 스스로 자신들의 경제와 민생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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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들과의 충돌로 형성된 객가족들의 웨이촌

 

 

또 한편으로는 객가족들이 형성한 웨이촌도 있다. 푸통화로는 커지아, 광동어로는 하카라고 불리우는 객가인들은 옛날부터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떠돌이 생활을 해 온 중국인들이다. ‘객가(客家)’라는 용어 자체가 외지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원에서 계속 남하해온 객가인들 중 신계 지역에 발을 들인 이들은 토착인들과 종종 충돌을 일으킨다. 이에 객가인들은 웨이촌을 형성하여 그들만의 생활 터전을 지키며 살아갔다. 

 

객가인들은 신계 지역 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 걸쳐 자신들만의 독특한 웨이촌을 형성한다.  이중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객가식 웨이촌이 샤틴에 있는 증대옥(曾大屋)이다. 

 

이곳은  증(曾)씨 가문의 생활 터전으로서 1848년에 지어졌다. 6,000제곱미터의 규모로 신계의 일반적인 웨이촌들과 다른 가옥 형태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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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곳은? – 판링의 라오웨이촌

 

 홍콩의 웨이촌은 주로 신계의 5대 씨족이 터전을 잡고 살아온 마을에 집중되어 있다. 5대 씨족은 등(鄧), 후(侯), 팽(彭), 요(廖), 문(文) 씨이며 주요 웨이촌이 위치한 곳으로는 판링, 윈롱, 셩수이가 있다. 그리고 샤틴과 췬완에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신계 지역은 총 200여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그중 ‘웨이(圍)’자를 지닌 마을 이름은 71개로 조사되어 있다. 그리고 웨이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마을이 57곳이며 사각형의 완전한 형태를 보존한 지역은 21곳이다. 

 

 

가장 오래된 곳은 판링에 있는 라오웨이촌(老圍村)이다. 판링역에서 10분 정도 차를 타고 좁은 시멘트 길을 따라 들어가면 작은 성곽의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이 마을은 등(鄧)씨 일가가 14세기부터 거주한 곳으로, 주변에 모두 5곳의 웨이촌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오래된 곳이 라오웨이촌이다. 작은 산의 구릉에 위치한 라오웨이촌은 사면이 두꺼운 벽으로 둘러쌓여 있다. 

 

정중앙에는 높은 전망대가 있어 그 위에서 도둑떼들의 출현을 감시하였다. 주민들은 동쪽의 작은 문을 통해서만 출입이 이루어졌다. 웨이촌 안에는 우물도 있었는데, 외적의 침입시 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서 식수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곽 위에 대포도 설치되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판링의 라오웨이촌은 1976년 홍콩 정부에 의해 법정 고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고 있는 웨이촌

 

웨이촌 주민들은 예로부터 제사를 중시하여왔다. 매년 입춘, 청명절, 중양절과 동지가 가장 중요한 제사일이었다. 입춘과 동지는 마을 사당과 가정에서 제사를 지냈다. 반면 청명절과 중양절은 산에서 성묘를 하며 제사를 치렀다. 

 

웨이촌 문화로부터 탄생하여 유명해진 음식도 있다. 바로 펀차이(盆菜)다. 펀차이는 여러가지 재료를 요리하여 커다란 그릇에 담아 먹는다. 여러 사람이 함께 다양한 재료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지금은 홍콩 전역에서 즐기는 요리가 되었다.

 

아시아의 금융 중심으로 곳곳에 고층 빌딩이 우뚝 솟아 있는 홍콩이지만, 이렇게 도심 외곽에는 400~500년이나 된 고대 건축 양식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웃들이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홍콩은 이주민들에 의해 형성된 도시다. 홍콩의 근현대사는 개항 및 중국의 공산화 등으로 대륙에서 넘어온 인구 팽창 역사와 함께 한다. 

 

반면 웨이촌은 오래전 이주해 온 이들이 정착하여 홍콩 현지 토착민으로서의 삶을 계승시켜왔다. 이로 인해 웨이촌은 비단 전통적 건축 양식뿐만 아니라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문화적 모습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나고 있다. 

 

홍콩 정부는 오래전부터 웨이촌의 전통 문화를 매우 중시하여 이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을 시행해왔다. 기회가 된다면 신계 지역의 웨이촌을 방문하여 홍콩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해 보는 것는 것은 어떨까? 


참고 자료: 《香港文化導論》, 王國華主編, 中華書局(香港)有限公司,2014

《香港圍村:現代都會中的古樸民俗》,南方日報, 2018年3月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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