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헌법적 성격의 기본법 반포
영국과 중국은 1984년 <중영연합성명>에 서명한 후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을 확정한다. 반환 후 영국 통치 당시의 법률인 <홍콩헌장> 및 <황실훈령>이 효력을 상실함에 따라 홍콩특별행정구는 새로운 헌법적 문건 작성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것이 바로 <기본법>이다. 당시 분단 국가였던 서독이 영구 분리를 방지하기 위해 헌법을 <기본법>이라 칭한 것에 착안하여 홍콩 역시 이 법률적 용어를 채택한다.
1985년 전인대에서 기본법초안위원회를 구성하여 180명으로 이루어진 위원들이 기본법 제정에 대해 논의한다. 제 1차 초안은 1988년 발표되었고 수정을 거쳐 최종 1990년 4월 4일 확정, 반포되었다.
과도기 정부와 중앙 정부의 마찰
이후 홍콩은 반환 전인 과도기 상태에 접어든다. 1992년 7월, 마지막 영국 총독 크리스토퍼 패튼이 부임한다. 그는 홍콩의 민주화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 개혁 방안을 내놓았지만 중국 측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특히 중국 정부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첵랍콕 신공항 건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중앙 정부의 공분을 산다. 결국 겨우 중국 측의 동의를 얻어냈으나, 신공항 건설은 양측간의 마찰을 겪으며 완공이 지연되어 1998년 7월에 이르러서야 개장되었다.
정당 형성의 붐, 행정 주도에서 행정과 입법의 분리 시대로
양국이 반환 문제를 놓고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홍콩의 정치가에서는 창당이 붐을 이룬다. 1992년 친중 인사들로 구성된 민건련이 창당되었고 1993년에는 상인, 기업가 및 전문 인력으로 구성되어 자유 시장 경제를 제창하는 자유당이 들어 선다.
그리고 1994년에는 홍콩의 보통 선거를 지지하고 정부에 대한 감시 기능을 정강으로 내세운 민주당이 문을 연다. 제 1당인 민주당을 필두로 이 세 정당이 반환 전까지 주요 정당으로 활약하였다.
아울러 식민지 정부 통치의 특징이었던 행정 주도의 관치에서 1990년대 들어 행정과 입법 분리의 변화를 맞는다.
중국 자본 기업의 성장, 중앙은행 기능의 금융관리국 설립
반환 전, 경제적으로는 중국 자본 기업이 영국 기업을 대체하며 홍콩 경제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한다. 1978년까지 중자 기업은 122개의 불과하였으나 1989년에는 2500개까지 증가한다.
또한 급팽창하는 중국 내수 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해 외국 기업들은 중국에 인접한 홍콩에 속속 사업 본부를 설립한다. 그리하여 홍콩에 들어선 지역 총괄 본부는1990년 572개, 1996년에는 816개, 2001년이 되어서는 944개 업체까지 증가한다.
이들 외자 기업은 주로 미국, 일본 및 영국이 주도하였다.
한편 반환 후 홍콩의 미래에 불안감을 느낀 HSBC는 기업의 국제화 전략을 채택하여 1990년 지주 회사를 영국으로 이전시킨다. HSBC가 수행해 왔던 홍콩 준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이 퇴색됨에 따라 이를 대체할 중앙은행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로 인해 1993년 4월 금융관리국이 탄생되었고 이후 홍콩에서의 중앙은행 역할을 담당한다.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1997년 7월 1일 자정, 완차이 컨벤션 센터에서 오성홍기가 올라가며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었음을 알린다. 초대 행정장관에 오른 퉁치화는 각종 개혁을 추진한다. 그러나, 마지막 식민지 총통이었던 패튼이 남겨 놓은 정책적 유산은 홍콩 정부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
패튼은 자유 시장 지지자로서 주택 문제 해결에 소홀하여 집값을 잡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버블 경제로 연결되어 훗날 아시아 금융 위기 당시 후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또한 패튼은 공무원들의 급여 대우를 크게 향상시켰는데, 퉁치화 정부가 들어선 후 재정적 적자를 줄이기 위해 급여 조정안을 내놓으며 공무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 아시아 금융 위기가 닥친다. 홍콩의 주식 시장은 폭락하고 부동산 거품이 터지면서 많은 기업들이 도산한다. 당시 실업률은 6.2%까지 치솟는다. 또한 2003년 발생된 사스의 영항으로 홍콩 경제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중앙 정부와 홍콩, 마카오는 더욱 긴밀한 경제 무역 관계를 수립한다(CEPA). CEPA 협정 이후 홍콩에서 생산된 대부분의 물자와 서비스업은 무관세로 중국 내수 시장 진입이 가능해졌으며 홍콩 업체가 중국내 투자, 통관시 수속 절차를 간소화하였다.
중국과의 긴밀한 경제 협력을 추구하는 CEPA 합의
아울러 2006년부터 CEPA 합의 하에 자유 여행이 가능해짐에 따라 중국인들이 대거 홍콩으로 건너 와 쇼핑 및 투자가 활발이 이루어진다. 이는 홍콩의 소매업, 음식업, 금융업 및 부동산 시장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통계에 따르면 2006년 CEPA로 인해 36,0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CEPA는 홍콩 내에서 빈부의 격차 확대 및 과도한 서비스업 편중의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초대 행정장관인 퉁치화는 연임에 성공하였으나 이후 사스 발생에 대한 미온적 대처, 국가 안보법 추진, 몇차례 이어진 실정 등으로 결국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005년 사직한다. 이어서 행정장관에 오른 인물이 도날드 짱이다.
그의 시정은 기본적으로 퉁치화 시대의 연장선에서 일정 부분 수정을 가하였다. 예를 들면 퉁치화 체제 때 사회 복지 차원에서 MPF 제도가 도입되었고 도날드 짱은 사회 복지 지출을 계속 증가시켰다.
퉁치화 임기 때 삭감된 공무원 대우를 다시 회복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날드 짱은 임기 동안 주택 문제에 있어서 부동산 업체의 이익에 편중된 정책을 펼쳐 비판을 받았다.
이상 3회에 걸쳐 홍콩의 현대사를 주요 흐름에 따라 정리해 보았다. 필자가 소개하는 현대사는 여기서 끝을 맺지만 향후 펼쳐질 홍콩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참고자료: 《圖解香港史》,周子峰,中華書局有限公司,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