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정공서(廉政公署 림징궁취, Indepen-dent Commission Against Corruption)는 홍콩의 반부패 수사 기구로서, 홍콩 특별 행정구 장관이 직접 지휘하는 독립적인 기구이자 독자적인 수사권을 갖춘 부패 방지 수사 기구이다.
▲ 홍콩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ICAC 요원
염정공서는 직원 1,200여 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부패 혐의자를 영장 없이 체포하고 48시간 동안 구금할 수 있는 수사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1974년 2월 15일 설립됐으며 홍콩에서는 중국어 약칭으로 廉署(림취)라 부른다. 본부 사무실은 홍콩 섬 노스 포인트에 있다. 완차이에 홍콩섬 지국이 있고 구룡반도와 신계 등에도 지국을 두고 있다.
공무원 등 공직에 의한 비리나 부정, 민간기업의 경우는 경영자의 동의가 있는 경우 수사 및 단속을 실시하고 있다. 수사는 시민의 신고나 밀고 또는 염정공서의 재량에 따라 이루어진다.
또한 영장이 없어도 부패 혐의자의 체포가 가능하고 필요시 권총 등 무기 휴대 및 경찰특공대인 SDU 동원도 가능하다. 염정공서는 강력한 수사권이 있지만, 용의자 기소 여부는 검찰을 거느린 율정사 몫이다.
염정공서의 역사
1950~60년대 영국 식민지 홍콩은 겉보기에는 경제성장을 이루어 발전한 부유한 도시였으나, 내부로는 총독부 관료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썩은 최악의 부패도시였다.
홍콩 섬에선 롤스로이스가 택시로 돌아다니고 란콰이퐁이나 완차이 등의 고급 클럽에는 여전히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현판을 내 걸고 식민지의 특권층인 영국인 이주민들이 문란한 파티를 벌이며 떼돈을 번 중국인 재벌들은 피난민으로 건너온 본토인 비서들을 하인 부리듯 큰소리를 치고 사치를 일삼았다.
그러나 같은 홍콩이지만 바다 건너 구룡반도는 중일전쟁, 국공내전 때 피난온 중국 주민들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베트남인 피난민들이 배 위에서까지 살며 어렵게들 살았고 섬의 사치, 향락, 번영은 남의 나라 일이었다. 이렇게 사회 자체가 아주 불합리했으니 부패는 당연한 거였다.
이때 홍콩인들은 차 값을 낸다며 뇌물을 은어로 표현했다. 어떤 경찰서장은 소위 차 값만으로 평생 먹고살 돈을 벌었다는데 실상은 마작을 하는 도박장의 뇌물을 받는 거였다.
공공기관의 부정부패도 심각했는데 어느 정도였냐하면 소방서에선 有水放水, 無水就無水放(돈이 있으면 물을 내주고, 돈이 없으면 철수한다...)라며 뒷돈을 안 주면 소방호스를 안 열어주었고, 구조작업 등을 했을 때 수고비를 요구하기도 했으며 구급대는 소위 유류비를 챙겼다.
병원에선 뒷돈을 찔러줘야 의사가 와서 진찰을 해줄 정도였다. 민간 기업도 채용시 면접관에게 소위 찻값을 건네야 합격이 되었고 차 값을 내지 않으면 합격해도 발령을 내지 않았었다. 학교 선생들도 백인이고 중국계이고 할 것 없이 촌지를 챙겼었다. 당연히 부패를 잡아야 할 경찰이나 사법부도 마찬가지였다.
판사들은 영국인, 중국인 할거 없이 둘 다 썩었었다. 본국인 영국 본토부터 영국병을 앓으며 부패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으니 당연하다.
그러던 중 1973년, 영국출신의 홍콩 경찰 간부인 피터 고드버(葛柏)가 당시 430만 홍콩 달러의 전횡을 저지르고 홍콩에서의 출국금지를 무시한 채 영국으로 간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홍콩 시민들은 일제히 시위를 벌이며 영국 중앙정부와 총독부에 고드버를 당장 홍콩으로 다시 데려오라고 들고 일어났다.
처음엔 고드버를 잡자고 시작한 시위가 더 커지고 커지며 홍콩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해 마침내는 그간 불합리하던 사회, 억압적인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까지 전이된다.
결국 여론에 굴복한 영국 중앙정부는 홍콩 총독 산하의 독자적인 반부패 수사기구 염정공서를 세웠다. 이후 염정공서의 서슬 시퍼런 부패단속과 지속적인 대국민 홍보로 인해 1980년이 되면 부패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원인 제공자였던 피터 고드버는 결국 1974년 4월, 영국에서 체포되어 75년 1월 자로 홍콩으로 송환되었다. 재판 후 징역 4년을 받고 살다 출소한 뒤 2017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홍콩은 부패제거와 높은 경제자유도를 토대로 영국병을 앓으며 지리멸렬해지는 본국 영국보다도 더 발전하게 된다. 1973 ~ 1974년을 사이에 두고 홍콩의 부패방지 3륜법과 염정공서 등 반부패와 관련된 기본적인 것들이 생겼고 이것들은 영국 식민지로 경제적인 번영은 누렸으나 내부는 후진적이었던 당시의 홍콩을 진정한 선진도시로 바꾸었다.
이 당시에 반부패 운동과 함께 홍콩을 청결하게 하는 클린 홍콩 운동까지 벌어졌으며, 경찰의 경우 전부 해고하고 젊은 경찰관을 새로 채용했다. 반부패 정책에 있어서는 외국 전문가를 초빙하는 등의 노력도 벌였고, 그 노력은 1980년이 되자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1979년, 크로스하버 터널 개통, 홍콩 트램을 대신할 새 도시철도인 MTR의 개통 등으로 인프라가 대폭 향상됐다. 이때쯤 홍콩이 선진국에 진입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되어 부패 자체가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물론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소리는 아니었다. 경찰 해고건의 경우엔 경찰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실제로 1977년 10월 28일에 경찰관들이 염정공서 건물에 난입해 유리창을 부수고 직원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를 경렴충돌(警廉衝突)이라 한다. 이 후 경찰과 염정공서와의 충돌은 2002년, 2010년에도 있었다.
최근의 염정공서
21세기 들어 수사 대상이 경제·행정에서 정치 쪽으로 선회함과 동시에 여러 삽질과 피의자 조사수법 등이 비판을 많이 받으며 예전만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2012년부터 시작한 썬홍카이 그룹이 연루된 전직 행정장관 도널드 창의 전횡 사건 수사 결과, 마침내 2017년 2월 감옥에 넣는데 성공하며 염정공서가 다시 옛 명성을 되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