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文化 트레일 - 香山 트레일

베이징 文化 트레일 - 香山 트레일

三山五園 2008년 하계 올림픽 장소로 예정된 베이징은 중국지형의 축소판처럼 북서쪽이 지대가 높고 동남쪽이 낮다. 북서쪽으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반 분지형인 베이징시를 에워싸고 있다. 특히 西山의 동쪽은 산과 호수가 어울려 遼·金이래 西郊風景名勝 지역으로 유명하다. 역대 왕조들은 이곳에 황실전용 사냥터를 만들거나 황실전용 사찰 등을 지어 황실의 정원으로 활용하였다. 청대의 풍류황제로 유명한 건륭황제는 이곳에 3산5원의 황실 정원과 별궁을 두었다. 이른바 3산은 향산, 옥천산, 만수산을 말하고 5원은 3산에 딸린 정의원(향산), 정명원(옥천산), 청의원(만수산)의 3원과 원명원, 양춘원 등 5개의 황실 정원을 말한다. 5원은 1860년 영불연합군의 약탈과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어 지금은 이름만 전한다. 그중 청의원(淸漪園)은 淸 광서황제가 1888년 모친 서태후를 위해 해군예산을 전용, 복원하고, 서태후의 천수를 축원(頤養天年)하는 의미에서 이화원(頤和園)으로 개명하였다. 557M의 향로봉 [[1[[ 3산의 하나인 향산은 해발 557M의 낮으막한 산으로 주말에 베이징 시민의 휴식처로 가벼운 등산코스로 최적이다. 특히 제5환로를 이용하면 시내에서 20-30분의 자동차 드라이브로 접근이 가능하다. 향산의 남동쪽으로 안고있는 각종 전각이며 절은 과거 정의원(靜宜園)의 일부였다. 향산의 최고봉이 향로처럼 생겼다고 하여 최고봉을 향로봉이라고 하고 향로봉이 있는 산전체를 향산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향산은 “향산 28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구석구석에 전각과 자연 경관이 어우러지는 절경이 많았는데 1860년 영불 연합군에 이어 1900년의 8개국 연합군의 무차별 약탈과 방화로 대부분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베이징의 시민공원 베이징은 遼의 五京의 하나로 중요시되어 왔지만 수도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 개발한 나라는 金이다. 12세기 金은 베이징에 근거를 두고 개봉의 宋을 압박하여 송황제를 납치하는 등 宋을 남쪽(항주)로 천도하게 만든 여진족 왕국이다. 金의 세종이 향산의 아름다움에 반해 대사찰 영안사와 행궁을 짓고 향산을 떠나지 않았다. 그후 지금까지 800여년간 향산은 베이징 지역에 살아온 역대 왕실의 사랑을 받아온 셈이다. 청대까지 황실 정원이기도한 향산이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오르기 좋도록 계단 길까지 깔아 놓아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와 있다. 구석구석 계곡을 끼고 만들어져 있는 수많은 산책 등산로는 베이징 시민들이 가볍게 산을 오를수 있도록 되어있다. 서울에 남산이 있다면 베이징에는 향산이 있다고나 할까. 산아래에서 1시간 남짓 걸으면 정상 향로봉에 오를수 있다. 향로봉에 오르면 베이징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인근의 과거 3산5원도 굽어 볼 수 있다. 향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지만 가을 단풍으로도 유명하다. 단풍이 절정에 오르는 10월에는 향산은 베이징 시민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수백년 수령의 다양한 고목이 건재하다. 금, 명, 청의 왕조시대의 황실의 사냥터 또는 정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향산의 중턱에 격운종이라는 곳이 있다. 산중턱에 종각이 지어지고 종을 메달아 놓은 곳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물다. 향산의 수많은 절의 저녁 종소리가 동시에 울려 나올때 이에 화음이 되어 울려주는 또 하나의 구름속의 종(隔雲鐘)이다. 향산 골짜기는 이미 이세상이 아니고 극락의 세계가 된다. 그 종은 영불 연합군에 의해 빼앗겨 지금은 종없는 종각만 남아있다. 傅作義의 和平起義 향산에 가면 빼놓아서는 안될 곳이 있다. 双淸별장이다. 이는 향산의 동남 방향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별장의 일부만 남아있는데 이곳이 신중국 산실로 유명한 곳이다. 중국의 모택동 주석이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에 그곳에서 南京진격 명령을 내리는 등 중국 통일 전쟁을 지휘하고 신중국 건설을 위한 작업을 했던 곳이다. 중국 공산당(중공) 중앙은 베이징에 들어오기 전에 하북성의 시빠이뽀(西栢坡)에 근거를 두고있었다. 1949.1 북경을 지키던 국민당의 傅作義 장군이 당시 베이징을 포위하고 있던 인민해방군과 협상, 평화적으로 베이징성을 양도함에 따라 인민해방군이 무혈 입성하게 된다. 중국 역사에서는 “和平起義” 라고 하는 傅作義의 결단으로 당시 200만의 베이징 시민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금성 등 수많은 유적이 불에 타지 않고 고스란히 남게 된 것도 “和平起義”의 결과이다. 이는 마치 일본이 明治유신 직전에 쵸수(長州) 사츠마(薩摩) 연합군이 德川막부의 에도(지금 東京)를 지키던 카츠카이슈(勝海舟)를 설득하여 에도에 무혈입성, 당시 수백만 에도(江戶) 시민을 구했던 것과 유사하다. 傅作義 장군의 장녀 傅冬菊이 당시 공산당의 지하당원으로 아버지의 이러한 우국결단에 큰 작용을 하였다고 전한다. 부작의는 후에 신중국 정부의 수리전기 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어릴 때 山西省 황하유역에서 자라면서 황하의 범람을 보고 “水利”만이 人民을 위한 造福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香山의 中共中央 ]]2]] 西柏坡의 모택동 주석 등 중공 중앙은 1949.2.22 부작의 장군을 접견하고 그의 용기를 치하한다. 그리고 2.25 모택동은 西柏坡에서 향산 인근 서원 비행장에 내려 열병식을 갖는다. 3년간의 내전이 끝나가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하다. 모택동은 1927년 호남성 추수폭동(9.9)을 일으킨 후 강서 井岡山에 入山, 남창 폭동(8.1)이후 정강산으로 들어온 주은래 및 주덕과 합류한다. 그들은 紅軍을 통하여 세력을 키워왔으나, 국민당의 수차례에 걸친 포위를 견디지 못하였다. 부득이 8만여명을 이끌고 강서 소비에트 해방구를 떠난다. 이른바 大長征이 시작된 것이다. 1934.10월에 출발하여 2년에 걸쳐 운남, 귀주, 고원과 사천성 장강 상류을 횡단 섬서성 延安까지의 12,000Km의 세계사에 유례없는 대모험이었다. 그후 2차 국공합작에 의한 항일전(1937-1945)과 내전(1946-1949)을 거쳐 옛 수도 베이징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1949.3.9 시빠이뽀에서 개최된 중국 공산당 7기2중전 결정에 따라 중공 중앙은 北京의 향산으로 본부를 옮기게 된다. “我們決不當李自成” 해방된 베이징의 중남해로 바로 들어오지 않고 중공 중앙이 향산 双淸별장으로 옮겨온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우선 안전이 문제였다. 베이징이 평화적으로 해방되었다 하지만 국민당 잔적이 남아있고 산동성 靑島가 아직 국민당 수중에 있으므로 청도에서 발진한 장개석 국민당의 비행기가 수시로 베이징 공습에 나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습에 노출되지 않고 방공호를 만들어 놓을 수 있는 향산이 유리하였다. 그리고 향산은 인근 西山의 공산당 주력군과 쉽게 연결되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대도시 上海 프랑스 조계에서 결성되어(1921.7.1) 孫文이 지도하는 국민당과 합작 북벌에 나섰다가 孫文 사후 蔣介石에 의한 반공쿠테타를 당한다(1927.4.12). 그후 국민당과 결별한 후 주로 농촌 중심으로 독자적 중국혁명 활동을 해왔다. 강서 정강산, 루이진(瑞金) 해방구에서 섬서성 延安까지의 대장정으로 농촌 환경에 익숙해 있었다. 베이징의 대도시 진입에는 약간의 적응기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당시 毛주석은 주은래와의 대화에서 마치 자신을 과거 시험을 치러가는 서생에 비유하면서 과거에 급제할 수 있을지 걱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明 말기 반란군 李自成을 예를 들면서 베이징을 일시 점령하였으나 결국 쫓겨나온 李自成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我們決不當李自成”의 각오를 되새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楊開慧와 毛岸英 모택동은 호남 장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당시 은사 양창제(楊昌濟) 교수를 찾아 베이징으로 상경하였다. 그의 사범학교 은사 양교수가 채원배 베이징대 총장의 요청으로 베이징대 철학과 교수로 전임되어 갔기 때문이다. 양교수에게는 아리따운 딸이 있었다. 그녀가 나중에 모택동의 첫사랑의 연인으로 첫부인이된 양개혜(楊開慧)이다. 양개혜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1950.11.25) 毛岸英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모택동은 상경후 잠시 양교수 집에 숙식을 하다가 호남성 출신들과 옛 北京大 근처에 하숙을 한다. 양교수가 그의 친구 李 대교 베이징대 도서관장에게 부탁하여 도서관 사서일을 맡게 하였다. 그후 양교수의 요절과 양개혜와의 결혼 등으로 北京을 완전히 떠난후 모택동으로서는 실로 30년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르바이트생 시골 학생 모택동이 30년후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 변신해 돌아온 것이다. 香山에서 태어난 孫文선생 香山에 묻히다. [[3[[ 香山(碧雲寺)에는 중국의 國父 孫文선생의 유체가 4년간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 1924.11 베이징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 장작림과 풍옥상이 손문을 초청하였다. 손문선생은 이 초청을 받아들여 그해말 北京에 왔다. 그러나 이듬해 1925.3.12 간암으로 北京에서 서거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陵이 준비되지 않은채 그의 유체는 향산 벽운사에 4년간 보존되어 있었다. 그후 1929년 남경 자금산의 지금의 中山陵으로 이장되었다. 중국 근대 민주혁명의 선구자 손문은 유별나게 향산이라는 지명과 관계가 깊다. 그가 1866.11.12 태어난 곳이 광동성 향산(나중에 손문의 호를 다서 中山으로 개칭)이고 서거하여 유체가 안치된 곳도 역시 향산이다. 그가 어머니를 따라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인 미국 하와이의 호누루루가 중국에서는 檀香山으로 부르고 있고, 의과대학을 다니고 의사로서 활동한 곳이 香山港 즉 香港(홍콩)이다. 香港은 영국인이 들어오기전에 지금의 빅토리아 피크(峰)가 향산(향로봉) 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사실 향로봉·향산은 사찰에 있는 향로를 의미하므로 과거 불교가 널리 보급된 국가에는 흔히 있는 이름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도 향로봉이 수없이 많은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香山으로 돌아온 I. M. Pei ]]4]] 향산에는 근대 건물로 향산호텔(香山飯店)이 있다. 이건물은 중국인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설계가 I. M. Pei의 작품이다. I. M. Pei(貝聿銘)는 1917년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에 유학 MIT와 하바드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세계적인 건축가이다. 그가 중국의 개혁개방에 맞춰 중국의 전통에 맞는 서양건축을 소개한 첫 작품으로 향산호텔을 설계하였다. 중국 강남의 정원과 베이징의 四合院의 조화를 이룬 설계라고 한다. 향산호텔은 1979년 설계 1982.10월 완공하였다. 유리를 이용 천정구조를 만들어 자연광(sky light)이 바로 들어오게 하는 설계이다. 홍콩의 유리건물인 중국은행의 건물, 파리의 루불 박물관 별관 유리 피라밋도 Pei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향산호텔 완공후 1983년 Pei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Pritzker 건축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10만불의 상금을, 미국에서 건축관계를 수학하는 중국인 유학생에게 장학금으로 내 놓았다. 이 장학금의 특징은 수혜자가 반드시 귀국, 중국에서 건축관계 일을 해야하는 것이다. 조국의 현대 건축발전에 큰 기여를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인지 모른다. 유주열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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