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월드컵 : 호랑이와 세발까마귀
한일 월드컵 축구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지금도 한국과 일본에서는 월드컵 열기가 아직 남아있다. 한국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아시아의 호랑이가 세계 4강이 된 것이다. 일본 선수들의 유니폼에는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유니폼뿐 아니라 JAWOC(일본축구조직위)의 공식문서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새다.
그림을 자세히 보자. 새의 색깔은 검다. 독수리 같기도 한 새 한 마리가 뒤를 돌아보고 있다. 앞서 가면서 따라오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얼핏 보면 놓치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새의 다리가 3개이다. 두 다리는 지면을 확실히 밟고 있는 모습이지만 공 하나를 쥐고 있는 다리가 또 하나 있다. 다리가 세 개 있는 검은 까마귀, 그것이 바로 문자 그대로 三足烏다. 한 다리가 쥐고 있는 것은 물론 축구공이다. 일본축구협회(JFA)의 상징마크인 三足烏다. 일본에서는 三足烏를 “야타가라스”(八咫烏)라고도 부른다. 烏는 까마귀이므로 “가라스”라고 부르지만 八咫烏라는 이름은 다리에 착안한 것이 아니고 크기에 착안했다. 八咫. 크기가 八자 정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이 싫어하는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까마귀와는 좀 다른 큰 까마귀, 거기에다 다리가 3개 있으므로 신령스러운 새임에는 틀림없다.
일본축구협회와 三足烏
이러한 새가 어떻게 일본축구협회의 휘장이 되었을까. 일본 측 인사에 의하면 일본축구협회가 결성된 당시의 협회간부가 지금 일본 미에현과 와카야마현 경계의 쿠마노(熊野) 출신이라고 한다. 쿠마노에는 쿠마노진자(神社), 那智진자 등이 있는데 그 곳에 가면 神社의 문장 및 상징旗에 “야타가라스”가 그려져 있어 어릴 때 그것을 보고 자란 그가 축구협회의 휘장으로 그 신령스러운 새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일본열도에서 남쪽으로 생선 배처럼 불룩하게 나온 부분의 끝에있는 熊野神社의 문장에 야타가라스가 들어가게 된 내력이 있을 것이다. 일본의 歷史書에 의하면 일본의 초기 천황인 神武天皇이 본래 지금의 九州 휴가(日向)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국토확장을 위해 四國섬과 일본 本州를 가르고 있는 瀨戶內海를 지나 지금의 쿠마노에 도착, 북쪽으로 산을 넘어 당시 야마토(大和)지방(지금의 나라지방)을 정벌하여 지금 日本의 건국 기초를 쌓았다는 것이다. 일본 歷史에서 야마토정벌, 또는 神武天皇의 東征으로 불리워지는 대정복전을 성공시킨 수호신이 있었다. 이 수호신이 바로 야타가라스, 三足烏 또는 八咫烏라는 것이다. 이 새가 神武天皇의 길안내를 해주었기 때문에 神武天皇이 어려움 없이 안전하게 이동하여 적을 무찌르고 일본열도의 중심 大和지역을 차지하여 오늘날 일본을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熊野神社는 당시 神武天皇의 東征軍이 일시 머물렀기에 東征軍의 旗에 쓰였을 三足烏를 그대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百濟武寧王陵과 日本天皇陵의 三足烏
지금 일본의 오사카 지역에는 거대한 능이 있다. 규모는 왕릉으로서 세계 최대로 피라밋보다 더 크다는 仁德천황릉이다. 능의 모습이 전방후원(앞이 네모지고 뒤가 궁근), 마치 키홀(key hole, 열쇠구멍)처럼 되어있고 주변이 성곽둘레의 못(堀)처럼 亥子로 보호되어 있다. 이 천황의 왕릉이 발굴되지 못하고 있다. 이 왕릉이 정식 발굴되고 않은 가운데 100여 년 전 큰비로 왕릉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그 속에서 인덕왕릉의 유물 일부가 나왔는데 그중에 銅鏡이 있었다. 옛날사람들은 지금처럼 유리거울이 없었으므로 청동거울을 예쁘게 닦아 거울에 대신하였는데 그 뒷면 손잡이 쪽에 여러 가지 吉祥무늬가 있다. 仁德천황릉에서 우연히 출토된 거울에는 천황가를 상징하는 三足烏, 즉 야타가라스가 나왔다. 지금 그 거울이 미국 보스톤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30여년전 우리나라에 역사에 남을 발굴행사가 있었다. 바로 공주의 무령왕릉 발굴이다. 백제의 무령왕릉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나왔다. 살아있을 당시 斯麻王으로 불리웠던 무령왕 출생의 비밀도 드러났다. 그가 일본에서 활약했던 백제왕족 昆岐의 아들이고 그의 부모님이 일본으로 가던 중 일본 九州의 카카라섬(加唐島)라는 곳에서 그를 낳았다. 그의 어머니가 배를 타고 가다가 예정보다 빠르게 産氣를 느껴 九州에 도착 직전 불시착한 곳이 카카라섬. 급한 나머지 바닷가 배 닿는 곳에서 멀지 않은 동굴을 찾아내어 그곳에서 아기를 순산하였는데 그 아이가 바로 사마왕이었다.
사마는 우리말의 “섬”, 일본어의 시마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마왕은 섬에서 태어난 왕이라는 의미다. 사마왕이 백제의 왕통을 이어받아 왕이 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유물속에는 일본뿐 아니고 당시 중국의 梁나라의 물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그가 동아시아 3국 교류의 중심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케 한다. 그의 유물속에도 銅鏡이 나왔고 그 동경의 모습이 仁德天皇릉에서 우연히 출토된 동경과 거의 같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물론 “야타가라스”가 있었다. 야타가라스는 백제왕의 심볼로서 무령왕이 평소 쓰던 칼(환도)의 손잡이, 신발 등 곳곳에 장식되어 있다. 백제뿐인가. 과거 고구려의 고분이었던 북한 평양근처에 남아있는 여러 가지 고분의 벽화에는 태양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야타가라스가 많이 보인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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