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비자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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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道주의의 일본 외교관 나고야를 중심으로 하는 기후현, 아이치현 분지는 한쪽에 바다만 없다면 3,000m의 고산에 둘러쌓여 있는 중국의 四川省 분지와 비슷한 지형이다. 북쪽으로는 막혀있고 남쪽에는 이세만이라는 바다를 끼고 있는 더할 나위없는 지역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林産物과 水産物이 풍부하여 일본에서는 山珍海味를 고루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高山에서 흘러내리는 江이 세 개나 되므로 민물생선도 무시 못 한다. 風水地理說대로 背山臨水가 곳곳에 있어서 人物도 많이 나오는 곳이다. 杉原千畝(1900-1986)도 기후현 八百津町가 낳은 人物의 한 사람으로서 60여 년 전 인도주의 외교관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한때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유대인인 스필버그 감독이 독일인 공장주인 쉰들러사장이 폴란드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게 된 유대인을 빼돌려 목숨을 구해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나치 치하의 추악한 독일인중에도 인도주의자 쉰들러가 있었다는 것을 널리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가 나온 후 일본은 일본에도 쉰들러 리스트에 비교할 만한 “스기하라(杉原) 리스트”가 있었다고 자랑하였다. 일본에서는 “이노치노비자(생명의 비자)”로 더욱 유명한 스기하라 영사가 그 주인공이다. 반유대인정책 나치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폴란드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 갑자기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총통 히틀러가 이끌고 있는 나치 독일의 반유대인정책이 점령지 폴란드에도 미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1차대전 패전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경제는 엉망이 되고 자신감을 잃고 있던 독일인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독일인의 우월성과 게르만피의 순수성을 강조,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희생 제물로 유대인이 찍히게 된 것 같다. 유대인의 고향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의해 점령되고 “마사다”의 최후 독립전쟁(AD66)이 실패하여 유대인은 뿔뿔이 흩어져 2,000년간 국가 없는 민족(stateless nation)으로 유럽 여기저기서 살아왔다.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극복하기위해 유대교라는 종교로 단합하고 근검절약과 자녀교육의 강화로 “굴러온 돌”이지만 현지 주민 못지않은 성공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현지 주민으로서는 불만이었다. 독일의 경제상황이 좋을 때는 몰라도 어려워지고 있을 때는 달랐다. 독일인은 어려운데 유대인만 잘 살고 있다고 본 것이다. 히틀러 나치당은 이러한 독일국민의 기분을 잘 알고 반유대인 정책을 쓴 것인지도 모른다. 나치당이 집권을 하게 됨에 따라 독일의 유대인은 미국으로, 또한 제 3국으로 피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독일의 폴란드 점령으로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인근 발틱 3국의 하나였던 리투아니아로 피신하였다. 아직 그곳은 나치 독일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1940년 7월 리투아니아에 일본의 영사관이 있었다. 스기하라 영사 1인의 영사관이다. 스기하라 영사는 1900년 1월 1일 설날에 태어나서 1924년 할빈 영사관에 근무함으로써 일본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 후 핀란드 헬싱키 근무를 거쳐 1939년 리투아니아의 수도 카와나스에 일본영사관이 개설되자 현지직원 몇 명과 부인과 자녀를 데리고 근무하고 있었다. 영사관이라고 해도 2층 독립주택 건물에 아래층은 사무실이고 2층은 거주공간이다. 리투아니아에 들어온 유대인에게는 이 나라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소련의 영향력이 강한 이 나라는 소련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소련은 독일의 움직임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의 손길이 리투아니아까지 뻗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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