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일제(made in Japan)하면 가장 먼저 찾는 것이 2개 있다고 한다. "소니"와 "토요타"이다. "소니"를 창업한 모리타(盛田)家, 토요타를 창업한 토요타(豊田)家 모두가 바로 일본의 중부지역 출신이다. 나고야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중부지역의 자랑은 토요타자동차 회사이다.
일본 경제가 지난 10년간을 "잃어버린 10년"(lost decade)이라고 어려워 하지만 중부지역만큼은 토요타자동차의 수출에 힘입어 불경기를 모르고 살아왔다고 한다. 자동차산업은 연관산업을 유발시켜 아이치현등 일본 중부지역은 직.간접으로 토요타자동차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일부 저널리스트들은 일본의 새로운 토노사마(殿樣 : 大名)는 토요타이며, 아이치현은 토노사마 토요타의 죠카마치(城下町 : 토노사마의 직할령)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하고있다. 그 정도로 일본 경제를 받쳐주고 있는 것은 토요타이다. 최근 IT 산업의 거품(바블) 붕괴로 IT 수출이 부진한 가운데 자동차만이 일본 수출의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작년도에 일본 전체에서 중부지역의 관문인 나고야항이 물동량의 무게뿐 아니라 금액면에서도 일본 최고의 항구라는 명예를 얻었다. 지금까지 자동차, 선박등 반출입되는 물동량의 무게면에서는 나고야향이 단연 톱이었으나 금액면에서는 IT 전문 수출항이던 토쿄항이 수위를 차지해 왔다. 그러나 토쿄항이 IT 산업의 침체로 수출이 여의치 않은 가운데 나고야항을 통한 자동차 수출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고야항에 뒤지고 만 것이다. 한때 "made in Japan"하면 전기제품이었는데 전기제품도 한국, 홍콩, 타이완등 후발국가에 밀려 적자 기업화 되어있는 데다가 무섭게 뻗어가는 중국의 전기제품에 압도될 날도 머지않아 앞으로의 전망도 밝지 않다.
나쇼날, 히타치, 마츠시타등 주요 전기메이커의 2001년도 전체 전기관련 기업의 적자액을 합하면 1조엔(10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러한 전기산업 1조엔의 적자를 1조엔의 흑자로 메우고 있는 기업이 바로 토요타이다. 2002.3월말 결산시 토요타그룹의 연결제무제표상의 흑자는 사상 처음으로 1조엔을 시현하고 있다.
豊田佐吉
세계 유명자동차의 이름은 사람 이름에서 나왔다. 포드자동차, 메르세데츠벤츠등이 그렇다. 그래서 일본의 자동차도 닛산(日産)을 제외하고는 창립자의 이름을 대부분 쓰고 있다. 혼다, 스즈키등이 그렇고 토요타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자동차로 세계적인 명성을 갖게 된 토요타자동차는 토요타사키치(豊田佐吉)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요타사키치는 1867년에 태어났는데, 당시 일본은 明治유신의 한 해 전으로 아직도 德川家가 권력을 잡고 있던 때이다.
佐吉의 어린 시절은 당시 江戶(지금의 동경)의 쇼군(將軍) 저택에 10대의 어린 明治天皇이 낯설은 에도생활을 시작하고 있던 때에 해당한다. 당시 아직도 幕府派(쇼군 지지파)들은 자신들이 官軍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츠마(薩摩) 쵸슈(長州)의 반정부 藩士들의 叛軍을 몰아내기 위하여 일본 東北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때이다. 250년 쌓아온 德川幕府의 세력이 하루아침에 시들기에는 뿌리가 깊었다. 그래서 天皇軍은 "官軍"을 마지막까지 소탕하기 위해서는 前進基地로 "에도"를 임시수도로 하여 天皇을 그곳에 모셔놓을 필요가 있었다. 아직도 에도 북쪽의 인심은 幕府편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天皇은 討幕혁명군, 당시는 攘夷尊王軍에 의해 임시수도가 된 "에도"에 살게된 것이다.
天皇이 자신의 王宮을 떠나서 자기 신하이던 쇼군의 저택에 거처를 옮긴 것이다. 혁명 天皇군의 에도 무혈입성 교섭이 성공하고 1867년 마지막 쇼군은 이른바 타이세이호우칸(大政奉還)이라는 이름으로 에도를 내주고 德川家康가 말년에 살던 후지산 아래 駿府(지금의 시즈오카)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때 쇼군과 함께 에도를 떠난 쇼군의 幕府에 근무하던 학자.관리들이 자그마치 14,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에도를 떠나 시즈오카쪽으로 몰려와 살게되자 조용했던 시즈오카, 그리고 인근 아이치현이 갑자기 文化의 중심지가 되었다.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開化며 서양문명이 뭔지 하면서 그들의 화제거리가 바다 건너 유럽에까지 확대되어 있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黑船를 끌고와서 日本天下를 한번 놀라게 한 것이 결국 250년의 德川幕府의 軍幕을 걷고 말았다. 이로인해 시즈오카, 아이치로 낙향한 幕府의 관리들은 서양을 진작 몰랐던 250년 幕府의 쇄국정책을 후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시대배경 속에 佐吉는 어머니가 옛날처럼 베틀에 앉아 어렵게 베짜는 것을 보고 새로운 시대상을 반영하는 방직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동양적 효도에서 시작한 새로운 발명품 방직기는 일본 중부지역의 모노즈쿠리(제조업)의 先驅가 된 셈이었다. 그는 그후 "綿業立國論"을 제창, 綿布의 수출을 강조하였고 지금도 일본 10대 발명가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