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川의 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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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두려워한 호족은 뼈대있는 집안인 德川였다. 그는 히데요시가 태어난 나고야에서 멀지 않은 오카자키(岡崎)의 영주의 왕자님이었다. 신분으로 봐서는 일개 평민출신의 히데요시와 비교할 수 없었다. 앞서 오다 노부나가가 소수의 군대로 今川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격퇴하던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분이 미천하여 오다의 步兵으로 참전했다. 德川은 今川의 소년(18세)선발대장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今川의 패배로 德川은 고향으로 도망가서 선조의 무덤 앞에서 자결까지 하려다가 마음을 바꾼 적도 있다. 그후로 오다의 동맹군이 되지만 德川은 기품이 있었고 뭐든지 참아내는 저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항상 불안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德川이 비옥한 고향을 등지게 하고 개간이 되지 않은 관동지역에다 전봉시키는 것이다. 당시 관동평야는 개척되지 않아 습지와 잡목이 우거진 벌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근의 원주민, "에조"가 수시 출몰하여 치안상으로도 어려운 곳이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험지를 德川에게 준 것이다. 고향 땅을 등지게 하여 개간의 미명하에 군을 못쓰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는 마치 중국의 패왕 항우가 그의 라이벌 유방에게 험지 漢지방을 분봉하여 그곳에서 말라죽기를 바란 것과 진배없었다. 德川은 군사들에게 칼을 버리고 낫과 괭이를 잡도록 하였다. 습지를 메우고 잡목을 베게하였다. 돌밭에서 쌀을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히데요시가 조선침략 전쟁에 출병할 군대를 할당하는데 德川에게는 싸움터에 나갈 군대가 없었다. 모두가 농군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침략 7년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대실패로 대부분의 호족이 군을 상실했고 히데요시는 결국 화병으로 죽게 되지만 德川은 농군으로 감춰진 군대를 재건하여 천하를 재통일할 수 있었다. 17세기가 되면 德川에 의한 250년간의 안정된 통일 일본이 계속된다. 히데요시가 임종시 어린 아들(히데요리)과 젊은 부인(요도)을 가장 많이 부탁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德川였다. 히데요시의 강요로 德川의 손녀딸(千姬)이 정략결혼으로 히데요시의 어린 며느리가 되어있었다. 그런데도 히데요시가 죽자 德川은 세키가하라(關ヶ原)전쟁을 거쳐 히데요시의 심복을 차례로 제거하고 최후 히데요리 母子의 居城, 오오사카성을 함락시키고 만다. 히데요리 母子는 자결함에 따라 豊臣家로부터 천하를 다시 통일한다. 德川은 太閤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보다 武人답게 征夷대장군으로 돌아가 그가 힘들여 개척한 에도(江戶)에 幕府를 설치한다. 일본역사상으로는 3번째이자 마지막 幕府인 셈이다. 지금의 東京이 정치 중심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德川이 東京以外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가장 중요시한 곳이 바로 이곳 나고야였다. 나고야는 천혜의 수량이 풍부한 기름진 평야에 위치하고 바다가 바로 옆에 있어 水路 또한 편리한 곳이다. 天皇이 있는 미야코와 멀지않아 여타 호족이 天皇을 끼고 도는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 오카자키를 지킬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는 나고야성을 히데요시의 오오사카성 이상으로 화려하게 짓도록 하였다. 자신의 아들중 똑똑한 놈을 城主로 봉한다. 70만석의 부유하고 화려한 성, 나고야성이 완성된다. 조선시대 조선통신사(副使)로 이곳에서 하룻밤 묵고 간 姜弘重은 그의 일기에 나고야를 기록하고 있다. "밤의 나고야 거리가 대낮처럼 밝았고 城이 아름답고 城下에 수만여戶가 살고 있으며 토지가 비옥하다". 성의 목재는 인근 해발 3,000m의 산악에서 베어다 長良川, 木曾川을 통해 운반하였다. 전국의 "모노즈쿠리" 장인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천수각에 올리는 돌고래(사치)는 황금으로 만들었다. 당시 18K 금화 18,000개를 녹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나고야의 "모노즈쿠리" 기술의 태동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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