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열도는 우리 나라와 어떤 관계일까. 지도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일본열도가 L자를 뒤집어 놓은 듯이 한반도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어찌 보면 아시아 대륙에서 빠져 나온 한반도를 안고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큰 덩치가 작은 덩치를 몸으로 막고있는 형국이다. 사실 일본열도가 한반도를 감싸 자연재해를 막고있기 때문에 한반도는 살기 좋은 "금수강산 삼천리"가 되었는지 모른다. 아시아에서 자연재해가 가장 많은 나라가 일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연재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이 지진이다. 일본열도를 지진열도라고 할 정도로 지진 다발지역이다. 일본 사람들의 生死觀이 분명한 것도 지진과 관련된다고 한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과는 달리 옛날에는 언제, 어디서 지진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한 집에 살고있는 사람 중에도 지진으로 안방에 자던 사람은 살고, 옆방에 자던 사람은 땅속으로 생매장되기가 일쑤라는 것이다. 최근 역사에서도 1920년대 관동대지진이며 1990년대 오오사카 고베 대지진 등으로 수천 명이 죽고 다쳤고, 규모가 적은 지진은 헤아릴 수도 없다. 일본의 으뜸가는 敵은 러시아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바로 지진이다. 지진으로부터 안전선언만이 일본의 번영가능케 한다. 지진을 막지 못하면 일본의 번영은 사상누각과 다름없다.
그런데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은 결코 지진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일본열도의 태평양 지역의 대형지진 발생가능성은 향후 50년간 90%까지 달한다는 보고가 있다. 지금의 동경에서 나고야, 오오사카까지 일본의 인구집중 주요도시가 지진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최 현대식 고가입체도로로 연결된 대도시가 지진 한방으로 그 도로가 아이들 장난감처럼 무너져 내린다고 상상해보자. 그 속에 깔려 벌레처럼 죽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과학자들에 의하면 바다 속에 플레이트라고 하는 대형 땅덩어리가 있다고 한다. 그것이 하나가 아니고 몇 개가 서로 맞물려 있는데 압력에 의해 서로가 조금씩 틀어지면서 감겨 있다가 언젠가 용수철처럼 원위치로 풀려나올 경우 그것이 지진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금 일본의 태평양 연안의 서로 틀린 땅덩어리, 플레이트가 물려있는 것이 곧 한계점에 달하여 되돌아 튀어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지금부터 향후 50년 사이에 언제든지 발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일본 인구집중 지대에 떨어질 피해를 일본인들은 생각하기도 끔찍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일본이 아니다. 예산을 대거 투입, 기존 도로며 건물의 내진 리노베이션을 하고 새로 짓는 건축물은 어떠한 지진에도 안전하게 대비한다. 어쨌든 이러한 지진 플레이트를 일본열도가 막고있어 한반도 쪽에는 그렇게 위험한 플레이트가 없어 우리는 지진걱정을 적게 하고 있는지 모른다.
카미카제 태풍
그 다음으로 태풍이다. 일본에는 봄부터 시작되는 태풍의 이름이 없다. 국제기상기구(IMO) 같은데서 여자이름으로 정하여 발표하므로 태풍의 고유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서는 태풍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이름 붙이기가 복잡해서인지 아예 1호부터 시작한다. 연말까지 몇 개나 오나 보자 하고 잔뜩 벼르고 있는 모습이다. 가끔 태풍이 찾아오는 나라의 경우, 예쁜 여자이름이나 붙여 "여자는 역시 무서워"하며 한가하게 얘기할 정도로 로맨틱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풍은 사업(시고토)"이라고 할 정도로 태풍자체가 행정의 주요대상이 되기 때문인지 모른다. 태풍은 항상 오키나와며 필리핀 등 아열대저기압으로 시작되어 일본열도와 우리 나라로 올라온다. 열대저기압 태풍이란 뭔가에 부딪히면 바람은 사라지고 비만 남아 한껏 뿌리고 없어진다고 한다. 폭우도 무섭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바람이다. 필리핀 근해에서 형성된 대부분의 태풍이 일본열도에 부딪히면 역시 바람은 없어지고 비만 잔뜩 뿌리다가 만다.
가끔 태풍의 진로가 제주도 쪽으로 직진, 북상해 올 경우 우리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지만 한반도까지 도착하는 태풍은 드물다. 일본열도는 그냥 평평한 섬나라가 아니다. 우리 나라의 어느 산보다 높은 3,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수없이 솟아있다. 그래서 "알프스"라는 이름마저 붙여져 있다. 그것도 몇 곳으로 나누어 북알프스, 남알프스 등으로 불리고 있다. 열대저기압이 이러한 높은 산에 부딪히면 깨질 수밖에 없다. 정말 일본열도는 한반도를 에워싸고 있는 천연방파제(water breaker),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방풍제(typoon breaker)라고나 할까.
그 태풍 때문에 일본열도는 그냥 바다에 쌓여있는 섬이 아니고 거친 바다에 쌓여있는 섬인 셈이다. 그래서 조선술, 항해술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 일본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기도 어려웠고 바깥 사람이 일본열도에 들어가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중국사람들도 역대로 일본 점령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유라시아 대륙을 통해 세계 최대의 나라 몽고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이 할아버지를 닮아 일본열도 침공을 명령한 것이다. 당시 몽고(元) 속국인 고려와 남송의 해군의 지원을 받은 몽고대군이 노도처럼 日本九州의 하카타로 몰려왔지만 역시 태풍으로 실패한다.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미군의 점령을 받기까지는 어느 외국군대도 발을 붙이지 못한 것도 이러한 자연재해를 역이용 한 것이다. 그래서 태풍마저도 카미카제(神風)라고 美化하면서 자연재해를 역으로 이용하여 국민단결로 이끌어내었다. 일본은 神으로부터 가장 선택받아 神風에의해 보호받는 나라라고 역설한 것이다.
한반도가 젖줄이냐 비수(匕首)냐
이러한 자연재해가 찾아오는 곳이 일본열도에서도 태평양쪽이다. 그래서 일본열도는 우리의 동해안쪽을 향해 누워있는 모습으로 그 많은 자연재해를 등으로 막고 한반도를 가슴으로 안고있다. 또한 한반도를 통해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대륙의 文化가 한반도라는 파이프를 통해 흘러나와 일본열도를 적시는 모습이다.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이 오는 태평양보다는 文化를 받아들이는 쪽을 향하여 누워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랬던 것이 7세기 중반 友好國이던 백제가 망하고 3국으로 나뉘었던 한반도가 唐과 신라에 의해 통일되면서 일본이 크게 위협을 느낀다. 생활근거지를 한반도에서 가급적 먼 곳으로 옮겨갔다. 자연재해가 많은 태평양측 東으로 옮아간다. 唐과 연합한 新羅가 자연재해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다.
九州의 다이자이후에서 세토내해를 지나 나니와(大阪), 그리고 나라(奈良)까지, 다시 나라에서 더욱 내륙쪽인 京都로 옮아갔다. 400여 년前 천하를 통일한 德川家康는 자신이 개척한 에도(동경)가 있는 關東평야로 정치의 중심을 옮겼다. 다시 더 東쪽으로 진출한 것이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지리상의 발견으로 태평양 항로가 열리게 되고 19세기 중반 미국의 쿠로후네(黑船)의 도래가 태평양시대의 도래로 이어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반도를 젖꼭지로 한 文化의 전수는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되었다. 文明은 태평양으로부터 오게되어 한반도는 더 이상 젖꼭지가 아니고 일본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비수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그 비수를 중국(淸)이나 러시아에 넘기지 않으려고 두 나라와 전쟁을 한다. 일본은 결국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끌어내고 비수를 손아귀에 넣게된다. 태평양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곳이 태평양연안 항구이다. 항구는 文物을 받아들이는 접수처이다.
일본열도 지도를 자세히 보면 태평양연안에서 가장 천혜적 항구가 2개 있다. 하나는 동경만이고 또 하나는 이세(伊勢)만이다. 그 중 이세만이 육지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항구의 모습이다. 그 이세만 가장 안쪽에 강 3개가 있는데 그중 큰 강 2개가 기소강, 나가라강이다. 이 강들은 해발 3,000m내의 북알프스산맥에서 흘러내리면서 나고야 평야를 적신다. 3각주의 기름진 벌판을 배경으로 背山(알프스), 臨水(이세만)를 하고있는 항구도시가 바로 나고야다. 인구 250만이지만 나고야를 싸고있는 3개의 현, 즉 아이치현, 기후현, 미에현을 합치면 인구 1,000만 명의 광역 나고야시가 된다. 이 천혜의 항구에 공장이 들어서고 군수물자를 만들어 내어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국침략을 할 수 있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을 놀라게 한 유명한 첨예전투기 zero機를 만든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 많은 동포들이 조선에서 강제집집, 동원된 것이 당연하다. 전쟁 중 군사시설이 즐비한 나고야는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 잿더미가 되었다. 그래서 전후 나고야는 100m 도로를 만들면서 도로가 넓직한 현대도시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전쟁 직후 폐허의 나고야에 우리동포가 수십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조국의 해방과 함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국선을 탔으나 그래도 4-5만이 남아서 열심히 살고있다. 한때 우리동포들의 밀집지역은 나고야역 주변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기차를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출항하는 귀국선을 탈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