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속담에 죽어서는 柳州, 살아서는 蘇杭이라는 말이 있다. 柳州는 광서성으로 아열대성 나무가 풍부하다. 아열대성 나무는 목질이 단단하여 관목으로 적당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 中國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목관을 만들어 시체를 넣어 장사를 치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돈이 조금 있는 사람에게나 可能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돈 없는 사람은 죽을 때는 柳州에 가서 죽으면 그곳은 관목이 지천이라 行旅病死者에게도 관을 짜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살아서는 蘇杭州라는 것은 蘇州와 杭州가 그만큼 사람 살기에 좋다는 뜻이다. 사람살기가 좋은 만큼 여러 가지 먹거리도 많았는지 모른다. 항주가 먹거리로 유명하지만 소주는 먹거리보다 정원의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운하로 연결되어 있어 중국의 베니스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이다. 근처에 太湖라는 거대한 호수가 있어 물을 끌어쓰기가 좋았던 것 같다. 소주에는 말이나 마차가 다니는 거리(街)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배(船)가 다니는 운하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주로 貨物이 들어오는 문은 운하와 연결되어 있다.
배로 물건이 운반되어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는 식이다. 소주에는 이러한 아름다움 때문에 南宋이후에는 돈많은 고관들이 좋은 정원을 만들어 놓고 은퇴생활을 하기에 적합하였다고 한다. 당시 수도가 杭州였으므로 수도에서 크게 떨어져 있지 않고 운하로 편리하게 연결되는 소주에서 사는 것을 즐겨하였다. 그러한 풍습은 남송이 망하고 나서 중국 전체가 몽골의 元에 의해 지배되면서 풍류를 아는 漢族은 이민족인 몽골족에게 굽실거리면서 元의 수도인 大都(지금의 북경)로 벼슬을 나가지 않고 소주, 항주 등 文化가 있고 따뜻하여 살기 좋은 江南에 칩거하였다. 따라서 벼슬에 나가지 않은 퇴직고관들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소주에는 拙政園, 留園, 造園 등 이름 있는 정원이 많다. 이러한 정원은 당초 돈 많은 대작고관들이 지어 살던 곳이나 돈이 떨어진 후손들이 후에 팔게되므로 주인이 수시로 바뀌게 된다. 明末의 大將帥로 吳三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찌기 소주의 造園의 주인이었다. 造園도 남송시대에 지은 건물이므로 수 십 명의 주인을 거쳐 吳三桂까지 흘러왔을 것이다. 吳三桂는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다는 陳元元과 함께 造園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후 吳는 수도 북경 방위를 맡기 위해 北京에서 멀지 않는 山海關을 지키는 장수가 되었다. 陳元元도 소주의 造園을 떠나 北京으로 왔다.
明末 中國은 대혼란에 빠졌다. 山海關밖에서는 여진족을 통일한 누루하치의 아들인 皇太極 등이 호시탐탐 中原을 노리고 있었다. 明末 혼란 속에 李自成이란 농민반란군이 수도 北京을 점령하자 당시 明의 숭정황제는 자금성 궁내의 경산에서 목을 메고 자살함으로써 明朝 최후의 황제가 되고 만다. 李自成은 無血로 자금성을 入城하고 사람을 보내 吳三桂 등 변방의 장군을 회유한다. 황제는 이미 自盡하여 더 이상 忠誠의 대상이 사라졌으므로 吳三桂는 부득이 이자성군에게 충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오삼계는 北京을 점령한 이자성의 부하들이 그의 애첩 陳을 농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吳三桂는 이러한 사실을 이자성에게 直訴하였음에도 이자성은 부하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어물쭈물하자 吳는 크게 화를 낸다. 그는 이자성에 대한 보복으로 난공불락의 山海關 성문을 淸軍에게 활짝 열어주어 버린다. 同族인 李自成보다 異民族인 여진(만주)을 선택한 것이다. 두만강 근처에 살다가 세종조 김종서에게 쫓겨난 여진족이 200여년간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숨은 이유중 하나는 陳元元이란 여인이 그 속에 있었던 것이다.
건륭황제와 꾸오바(鍋巴)
산해관을 통해 물밀 듯이 하북평야로 쏟아져 들어온 淸軍은 李自成을 쫓아내고 지금의 심양에서 北京으로 淸帝國의 수도를 옮기고 明의 황궁 자금성을 만주황실로 삼는다. 그 造園에서 멀지 않는 곳에 松鶴樓라는 식당이 있다. 이 식당은 소주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식당 老店중의 하나이다. 이 곳에서 빠뜨릴 수 없는 메뉴에 鍋巴라는 것이 있다. 구수하게 기름에 볶은 누룽지(중국에서는 밥솥밑의 밥이라는 뜻으로 鍋底飯이라고 한다)에 생선과 야채를 끓여 만든 湯流를 붓는다. '솨'하는 소리가 군침이 나오게 한다. 소리와 음식의 조화이다. 와삭와삭한 누룽지가 스며든 탕과 함께 입안에서 녹는다. 이 인기 있는 鍋巴는 청조 건륭황제와 관련이 있다고 전한다. 淸朝의 最盛期 건륭황제는 平服으로 몇 사람의 보디가드만 거느리고 北京에서 천리 江南에 나들이를 자주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밤 그는 소주를 거닐다가 밤늦게 유명하다는 송학루를 찾았다. 송학루는 시간이 늦어 음식주문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음식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기품이 당당해 보이는 손님은 수하들과 함께 뭔가 요기를 원하고 있으니 주인은 음식 남은 것이라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밥은 이미 동이나고 솥 아래 누룽지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고 탕 용기에는 생선, 야채 국이 조금 남아 있었다. 주인은 누룽지를 긁어 다시 기름에 볶고, 탕즙을 이것저것 모아 다시 끓여서 그 누룽지 위에 쏟아 부었다. 난생 처음으로 이러한 요리맛을 본 건륭은 즉석에서 天下第一菜라고 좋아하였다. 소주의 鍋巴가 지금도 유명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연고 있는 지 모른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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