食在香港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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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 속에 행복의 조건으로 미국의 집에 살면서 불란서 와인을 마시고 중국요리를 먹는다는 것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몰론 이것은 어느 정도 주관적이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금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요즈음 세계도처에 미국식 집이 많아지듯이 행복의 조건도 모든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중국요리는 여전히 세계요리 중에서 가장 발달된 요리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중국 5000년의 긴 역사가 그 음식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국수를 서양에 소개 스파게티를 만들게 한 이후 서양 사람들에게는 중국요리가 제대로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고 그것도 미국을 통해서이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중국음식이 "찹 쉐이"다. 밥을 중심으로 이것 저것 섞어 만든 것이 찹 쉐이인데 19세기 중엽 미국의 골드 러쉬와 대륙횡단 철도부설에 필요한 노동자(苦力)송출에 따라 많은 중국사람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골드러쉬도 끝나고 철도부설도 끝나면서 그들이 미국에 주저 앉으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차이나타운이고 그 차이나타운의 중국식당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것이 찹 쉐이였다고 한다. 찹 쉐이의 찹(雜)은 이것저것 섞어서 만든 음식의 뜻이고 그러한 찹 쉐이를 먹는 두 개의 막대기(젓가락)를 "찹 스틱"으로 불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중국하면 짜장면과 이상한 중국 이름의 淸料理를 연상하듯이 중국과 중국음식을 곧잘 연결하여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 때 중국사람을 "짱 꿰이"(掌櫃)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것은 짜장면 집에서 돈을 받는 카운터(櫃)를 맡고(掌) 있는 사람이 중국사람(華僑)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북경으로 근무라도 나가게 되면 주위 사람의 부러움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청요리 실컷 먹겠네"가 된다. 그런데 막상 북경에 가보면 괜찮은 "청요리"는 모두 홍콩으로 가고 북경의 중국식당은 지아창차이(家常菜)만 있다는 것이다.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되자 호의호식하던 브로좌지(資本家)들은 모두 쫓겨가고 그들과 함께 고급스러운 음식이며 음식문화도 함께 떠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경의 식당에 남아있는 것은 인민의 식사인 家常菜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人民公社시절에는 북경의 동네마다 밥공장이 있어 집에서는 밥을 해먹지 않고 모두 공동식사를 하였기 때문에 그나마 家常菜를 파는 식당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등소평의 개혁·개방으로 점차 북경, 상해 등 주요도시에 외국인이 드나들게 됨에 따라 호텔이 생겨나고 외국인들 구미에 맞는 레스토랑이 차츰 생겨나게 되었다. 주요도시의 호텔이란 것이 대부분 홍콩에 근거를 두고 있는 화교자본으로 세워진 것이고 그들이 체인형태로 북경·상해 등에 호텔을 지으면서 그 호텔에 식당도 체인으로 가지고 갔다. 호텔 카운터의 지배인 뿐 아니라 식당의 주방장도 모두 세트로 홍콩에서 데리고 간 것이다. 호텔 식당의 중국음식 맛이 괜찮으면 이 식당의 요리사는 홍콩사람이라서 그렇다고 알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요리는 그 자체가 갖는 브로좌지적인 성격으로 신중국 성립 당시 중국에서 유일한 자본주의 아성인 홍콩에서만이 지켜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산혁명 전 일류 요리사는 모두 홍콩으로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970년대에 가서 개혁·개방의 중국 대륙에 가장 먼저 상륙한 것이 외국인용 호텔과 음식점이었고 모두가 홍콩의 전문인력이 진출한 것이므로 이 분야에 있어서는 중국에 대한 홍콩화가 가장 빨랐다고 볼 수 있다. 홍콩의 요리사들이 북경에 와서 홍콩요리만 보급한 것이 아니라 옛날의 북경 중심의 전통요리도 발굴해 내었다. 사실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북쪽 지방음식은 육류중심으로 다양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북쪽은 겨울이 길고 바다가 멀어서 음식을 만드는 재료가 부족해서이다. 그런 점에서는 중국의 남쪽 광동성은 아열대 기후로 일년내내 야채가 풍부하다. 그리고 바다 뿐 아니라 호수며 강이 있어 어패류로 담수·해수 가릴 것이 없다. 또한 인근에 높은 산도 많아 山珍海味가 이곳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광주가 중국에 있어서 동남아와 서양으로 나가는 유일한 창구(window)였다. 그래서 이 지역으로 진출한 화교들이 일찍부터 개발한 동남아의 풍부한 음식 재료로 중국요리를 다양화시키고 이것이 광주로 다시 역수입되었다. 광주에는 날라 다니는 것은 비행기 빼고, 네 발 달린 것은 책상 빼고 뭐든지 요리해 낼 수 있다는 말처럼 모든 것이 음식재료로 쓰일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라고 본다. 食在廣州라는 말이 그때부터 내려왔던 것 같다. 중국에서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 가운데, 살아 있을 때는 蘇州와 抗州가 가장 좋고(호수와 운하가 어울려 景色이 뛰어난 지방), 죽을 때는 柳州(棺木이 풍부한 지방)가 좋지만 음식은 뭐라해도 광주에 가서 먹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이른바 죽의 장막이 둘러치게 되자 중국전역의 요리사들이 그 요리를 알아주는 사람과 돈을 찾아 홍콩으로 러쉬해 오게 되자 이제는, 食在香港이 된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북경에 살다가 홍콩으로 이사하게 되면 북경에 남아있는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데 "이제 진짜 청요리 먹겠네"가 된다. 정말 홍콩에 와 보니 홍콩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먹자골목"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구석구석 음식점의 연속이었다. 홍콩이 중국대륙의 축소판으로 각 지방의 음식이 골고루 내려와 있을 뿐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점답게 음식의 경우에도 세계 각국음식이 모두 모여 상설 음식 박람회장 같기도 하다. 이러한 음식의 천국 홍콩에서 1년이면 대충 1,000끼니를 먹어야 되고 그 끼니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외람스럽지만 食在香港에서 중국음식을 중심으로, 들은 풍월 먹은 풍월을 나름대로 한 번 정리해 보고저 한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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