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개항 초기, 홍콩섬의 사이완(Sai Wan, 西環)과 셩완(Sheung Wan, 上環)은 태평천국의 난을 피해 중국 대륙에서 피난 온 이주자들로 가득했다. 당시 영국 식민지 정부는 장례에 관한 정책이 부재했다.
따라서 장례를 치를 공식적인 장소 또한 지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사망자들을 산자락 아래에 묻어두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한다. 1856년 한 언론에 다음과 같은 독자의 투고가 실렸다.
“현재 유행하던 전염병 페스트로 매일 약 30명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하지만 마땅히 장례를 치를 장소가 없어 2미터 깊이의 땅을 파서 흙과 풀로 덮은 후 산 아래에 묻고 있다.”

문제는 시신들을 관에 넣지도 않고 맨땅에 묻어버리는 일들이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비가 내렸다 하면 시신들이 지면 위로 노출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이때부터 산 아래의 경사진 노면은 사람들에 의해 ‘무덤가’로 불렸다. 1869년이 되어서야 도로의 정식 명칭이 보얀가(Po Yan Street, 普仁街)로 명명된다. 그리고 1870년, 최초의 중의학 병원이 들어서는데 현재 보얀가 12번지에 위치한 동화병원(Tung Wah Hospital, 東華醫院)이다.
동화병원은 당시 시신 처리의 대리 기관 역할을 담당하였다. 보통 연고 없이 버려지거나 방치된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결국 병원 측은 정부에 공식 건의하여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지금 보얀가는 어떤 모습일까? 동화병원을 비롯하여 도심의 휴식지가 형성되었다. 예전에는 동네가 관을 파는 상점들로 가득했지만, 현재는 화랑, 고급 식당, 카페와 바 등이 늘어서 있다. 당시의 음산한 기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도로명으로서는 독특한 이름을 지닌 린드허스트 테라스(Lyndhurst Terrace, 擺花街). 홍콩 개항 초기 이미 이곳은 고급 기생집들이 집중되어 있는 집창촌이었다. 당시 고객들은 꽃 한 송이를 사 와 기생들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자연히 꽃집들이 일대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동네는 요정과 꽃집이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유흥가 내의 기녀들은 대부분 포르투갈 출신이었고, 유럽 상인과 영국군들이 단골 고객으로 드나들었다. 이에 반해 현지인들은 중국인 운영 업소에만 방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주로 태평산(Victoria Peak, 太平山) 스트리트, 포힝펑(Po Hing Fong, 普慶坊, 태평산 산자락), 헐리우드 로드(Hollywood Road, 荷李活道)에서 영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천재지변, 대화재, 전염병 등으로 대거 써이항하우(Possession Point, 水坑口)로 자리를 옮긴다.
1903년이 되어 당시 홍콩 총독 네이선(Sir Matthew Nathan)은 모든 업소들을 셱통추이(Belcher Point, 石塘咀)로 이주시킨다. 이 조치로 린드허스트 테라스에는 꽃집들만 남게 되었다. 일대는 이후 몇 곳의 꽃가게 외에 센트럴 금싸라기 땅 소호(SoHo, 蘇豪) 구역으로 탈바꿈한다. 태평산 스트리트와 포힝펑은 각각 포호(PoHo) 구역과 노호(NoHo) 구역이 되어 소호 구역과 함께 센트럴의 금싸라기 삼각지대를 이루고 있다.
1987년작으로 장국영과 매염방이 주연을 맡은 ‘연지구(루즈 Rouge, 胭脂扣)’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셱통추이 일대의 기생촌이었던 탕서풍월(塘西風月)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03년 셩완, 사이완, 써이항하우의 모든 요정들은 셱통추이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이후 탕서풍월의 화려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가장 흥성했을 때는 셱통추이에 100개가 넘는 요정이 영업을 했다고 한다. 이 중에는 기업화되어 대형 업소로 운영하는 곳도 있었다. 100여 명의 기생을 두고 3~4층 높이의 건물에서 장사를 하는 업주도 등장한다. 하지만 1935년 6월, 식민지 정부가 요정 사업을 불법화하며 셱통추이 유흥가는 직격탄을 맞는다.

이곳은 홍콩대학교(The University of Hong Kong, 香港大學) 인근으로 현재 많은 학생들이 거주하고 있다. 아울러 현재 산길에는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다. 대학과 집창촌이 동거하던 시기에는 홍콩대를 이전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무산된 바 있다.
1950년대를 기점으로 완차이(Wan Chai, 灣仔)의 리통(Lee Tung)가는 대형 인쇄소들이 밀집, 운영되었다. 그리고 점차 인쇄 제품 중심지로 변모되어 발전한다. 일반적인 인쇄품 외에도 편지봉투, 명함 등이 제작되었다. 1970년대에는 청첩장, 홍빠오(Hongbao, 紅包), 후이춘(Fai Chun, 揮春, 설에 글을 써서 붙이는 빨간색 종이)도 인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가 되어 사람들에 의해 ‘청첩장 스트리트’로 널리 알려진다. 결혼을 앞둔 홍콩의 예비 신랑신부들은 리통가를 방문하여 마음에 드는 청첩장을 골라 인쇄를 의뢰하였다. 이곳의 장점은 원스톱 서비스였다. 모두 탕루(Tong Lau, 唐樓, 아래는 상점, 위에는 주거지 형태로 동서양의 건축 양식이 결합된 건물)에 위치해 있었는데, 가게와 인쇄소를 함께 운영하여 고객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였다.

2005년, 정부가 이 땅을 매입하게 되면서 거리의 면모는 바뀌게 된다. 인쇄소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 일대는 재건축으로 인해 새로운 건물과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지금은 인쇄소와 아무 관계가 없는 고급 주택가들이 거리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참고 문헌
<香港百年>,雪姬,昌意市集,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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