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나마 대법원이 홍콩계 CK 허치슨 산하 파나마 포트 컴퍼니(PPC)에 부여된 파나마운하 양단 항만 컨세션의 근거 법률을 위헌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1997년 체결된 장기 계약은 단숨에 효력을 잃었다. 이는 단순한 계약 해지가 아니다. 연간 1만 4,000척 이상의 선박이 통과하고 전 세계 해상무역의 5~6%를 감당하는 핵심 항로의 주인이 사법적 판단 하나로 뒤바뀐 사건이다.
미국은 이를 "서반구에서 중국 영향력을 되돌리는 법치의 승리"로 환영했고 CK 허치슨은 즉각 국제중재 개시를 공식화했다. 파나마 법정의 판결 하나가 글로벌 물류와 인프라 금융의 항로를 다시 긋고 있는 것이다.
1997년 파나마 정부는 법률 제5호를 통해 PPC에 발보아•크리스토발 항만의 개발•운영권을 부여했다. 이 컨세션은 행정 계약이 아닌 국회가 통과시킨 법률의 형태를 취해 정권이 바뀌어도 쉽게 뒤집을 수 없는 견고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2021년 계약 연장까지 더해지며 PPC는 연간 약 260만 TEU를 처리하는 발보아와 110만 TEU 규모의 크리스토발을 아우르는 장기 운영권을 확보했다. 파나마는 외국 자본으로 항만을 현대화하고 환적 허브로 도약하는 전략을 택했고, CK 허치슨은 미주와 아시아를 잇는 물류의 핵심 요충지를 장악하는 듯했다.
그러나 균열은 감사를 통한 행정 절차에서 시작되었다. 2025년 파나마 감사원은 CK 허치슨이 약 12억 달러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로열티•수수료•세금 감면을 종합할 때 국가 재정에 불리한 계약 구조였다고 결론 내렸다. PPC는 감사원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계약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 왔다고 반박했지만, 정치권에서는 이미 불평등 계약 시정이라는 여론이 형성된 뒤였다.
이 흐름은 결국 대법원에서 수렴했다. 파나마 대법원은 2026년 1월 법률 제5호와 그 연장 규정을 위헌으로 의결했다. 특정 사업자에게 과도한 혜택을 부여해 헌법상 공익과 형평을 침해했다는 것이 핵심 논거였다. 이로써 30년 가까이 항만 운영의 법적 토대가 되어 온 규범이 한 번에 무효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사건이 지닌 사법적 징발의 성격이다. 정부가 행정명령으로 자산을 몰수하는 직접수용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사기 쉽다. 반면 파나마는 최고법원의 위헌 판결이라는 법치의 외피를 통해 장기 계약의 법적 근거 자체를 소멸시켰다. 이는 투자자에게 가장 방어하기 힘든 형태의 수용 리스크다.
이 판결의 지정학적 함의 또한 명백하다. 미국 국무부와 의회는 이번 결정을 "중국에 부여된 컨세션을 되돌린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지지했고, 루비오 국무장관이 오래 우려해 온 ‘중국의 파나마운하 통제 시나리오’는 사법부의 판결로 저지되었다. 판결 직후 파나마 정부가 덴마크 머스크를 임시 운영사로 지정한 것은 이 사건이 단순한 법률 분쟁을 넘어 공급망 안보 재편의 맥락에서도 읽혀야 함을 시사한다.
파나마 정부는 운영 공백을 최소화하는 한편 무리노 대통령은 발보아•크리스토발 항을 분리해 새 조건으로 재입찰하겠다고 예고했다. 세제 혜택 축소, 국가 수익 배분 확대, 복수 사업자 경쟁 도입이 향후 핵심 방향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운하 통행이 파나마 GDP의 약 6%, 연간 2,700억 달러 규모의 교역을 떠받치는 만큼 법치 회복과 투자 매력 유지 사이의 균형을 놓치면 국가 전체의 자본비용이 높아질 수 있다.
이제 사건의 무게중심은 국제중재로 옮겨가고 있다. CK 허치슨은 국제상공회의소(ICC) 중재를 통해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파나마 정부는 헌법상 공익과 주권적 결정을 방패로 삼겠지만 중재판정부는 국내 헌법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이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국제법적 보호 의무를 위반했는지를 냉정히 가릴 것이다.
2012년 아르헨티나의 YPF 국유화 사태가 보여주듯 장기 자원•인프라 계약은 정치 변화에 취약하다. 하지만 파나마 사태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정권 교체와 정책 선회가 누적되면 감사•검찰•사법 절차가 정치적 목적을 위한 '합법적 무기(Lawfare)'로 활용되어 계약 자체가 백지화될 수 있다는 서늘한 신호를 보낸 것이다.
결국 파나마운하를 둘러싼 이번 충돌은 선박의 항로가 아니라 자본과 법의 항로를 둘러싼 싸움이다. 국가들은 여전히 외국 자본을 필요로 하지만 안보 환경이 바뀔 때마다 과거의 계약을 헌법의 저울 위에 다시 올리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서명된 계약은 출항에 불과하다. 정권이 바뀌고 헌법의 잣대가 들이닥치는 좁은 수로를 무사히 통과해야 비로소 목적지에 닿는다. 파나마운하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