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일기가 내걸린 페닌슐라 호텔, 군사 지휘부로 이용
돌아오는 8월 15일은 우리 나라가 광복 76주년을 맞는 날이다. 홍콩도 3년 8개월간의 일제 강점기가 있었다. 1941년 12월 25일, 영국이 항복 문서에 서명함에 따라 홍콩은 일본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후 일본은 홍콩을 대동아공영권의 군사 및 경제적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군은 침사츄이 페닌슐라 호텔에 욱일기를 내걸고 이곳을 군사 지휘부로 이용하였다. 영국 정부가 항복 문서에 서명한 곳도 페닌슐라 호텔 3층이었다.
일본 군사 정부는 홍콩을 총 28개 지역으로 나눈 후 각 지역마다 사무소장을 두어 관리하였다. 이는 전후 홍콩 지역 분할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일본 점령 시기는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다. 일본군의 통치는 불합리, 자의적이었고 적지 않은 서양인들과 중국인들이 약탈에 동참하였다.
1942년 봄, 일본군은 홍콩 전역에 인구 조사를 실시한다. 이때 시민들에게 주민증이 발급되었는데, 이것은 홍콩에서 최초로 등장한 신분 증명서였다. 그러나 신분이 불분명한 사람들은 잡혀 갔고 이 기간 동안 살해나 체포로 실종된 숫자가 2,000명 이상에 달하였다.
1942년 8월, 일본군은 완차이의 록하르트 로드에 500개의 위안소 설립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곳을 봉쇄하는 동시에 이 지역의 주민들을 3일 내에 떠나도록 명령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집을 잃고 노숙자 신세가 되었다.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거나 홍콩을 떠나는 사람들, 소문으로 떠도는 인육 사건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에는 광저우가 일본에 함락되자, 많은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넘어온다. 1941년, 홍콩의 인구는 160만까지 증가한다. 홍콩은 원래 경작지가 많지 않은 곳으로 풍부한 식량을 생산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로 인해 생산되는 모든 농작물은 전부 홍콩 내수용으로 공급되었다. 일본이 점령하기 전 홍콩 내의 쌀 비축량은 80만 포대로서, 이는 홍콩 전체 인구를 반년간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홍콩을 점령한 이후 비축량을 남태평양 전쟁에 지원 물자로 공급함에 따라 홍콩 내부적으로 식량 부족 상황을 맞게 된다.
우선 홍콩 내에서는 식량 배급제가 시행된다. 그리고 백만이 넘는 홍콩 시민에 대한 식량 공급의 부담감으로 중국인 귀향 정책이 추진되었다.
일자리가 없거나 거주지가 없는 사람들을 홍콩에서 떠나게 하였고 귀향 지도사무소를 설립, 홍콩인들이 중국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원하였다.
홍콩 내에서는 또한 일본군에 의한 양민 학살 및 부녀자 강간 사건도 연일 발생한다. 결국 일본의 점령은 홍콩판 엑소더스로 이어졌다. 일본이 귀향 정책을 실행한 이후 홍콩의 인구는 160만에서 1945년 8월 전쟁이 끝날 당시 60만까지 감소하였다.
자의든 타의든 홍콩을 떠난 100만의 이민자들은 일본 헌병의 심문을 받거나 가는 도중 강도를 만나 약탈을 당하는 등 산전수전을 겪으며 중국 대륙에 도착하였다.
또한 일본의 귀향 정책하에 실업자나 거지 등은 강제로 목선에 태워져 공해로 보내졌다. 이들은 충분한 식량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사하거나 약탈을 당하는 한편, 일본인에 의해 격침되기도 하였다.
약탈성 금융 정책으로 군표 발행 및 홍콩 화폐 사용 금지
일제 기간 동안 홍콩에서는 약탈성 금융 정책이 시행된다. 그 일환으로 군표(軍票)가 발행된다. 이는 일본 정부가 자국 군인들에게 급료와 지급품을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환율은 일본군이 마음대로 정하였다.
이것이 화폐 기능을 담당하여 홍콩에서 유통되다가 1943년 6월에 이르러서는 아예 홍콩 화폐의 사용이 전면 금지된다. 가지고 있던 홍콩 화폐는 4:1의 비율로 군표와 교환되었다.
만약 숨겨 놓은 홍콩 화폐로 물품을 구입하다 적발 시에는 일본군에 의해 고문을 당하거나 사망에 이르렀다.
식량 배급제가 선포될 당시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여 시민들간 식량 쟁탈전이 벌어졌다. 1943년 이후,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자 홍콩의 물자는 심각한 공급 부족 사태를 맞는다. 거기에 더해 군표 발행으로 물가가 폭등하여 결국 1944년, 일본은 배급제 폐지를 선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941년 9월부터 1943년 5월까지 물가는 10~15배 폭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배급제 폐지 후 쌀값이 급등하면서 빈곤층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급기야 인육 사건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등 민심 또한 흉흉하였다.
1945년 8월 30일, 영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 하코트가 이끄는 영국군이 어드미럴티에 상륙하여 홍콩을 접수하면서 3년 8개월간의 일본 식민지 역사는 막을 내린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이 홍콩을 침략할 당시 그 선봉대에 많은 조선인과 대만인을 내세웠다고 하는데, 내심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이곳 현지인들에게서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갖고 있는 반일 감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의 식민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홍콩 사람을 보지 못했을뿐더러 오히려 일본 문화와 제품에 우호적이고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100년이 넘는 영국 식민지 기간에 비해 3년 8개월이란 일제 점령기는 너무 짧았기 때문일까?
참고자료: 《香港史100件大事》,蔡思行,中華書局,2014
《圖解香港史》,周子峰,中華書局有限公司,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