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은, ‘왜?’라는 질문을 하는가 / 하지 않는가로 나뉩니다. 아이는 질문합니다. 어른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성장하는 사람은 질문합니다. 멈춰 있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개인도, 사회도 동일합니다. 그만큼 ‘왜?’라는 질문은 중요합니다.
아이는 성장하며 질문합니다. ‘왜?’의 연속입니다. “왜 사탕은 달아요?” 등,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쏟아냅니다. 부모님은 진지하게 최선을 다 해 대답을 해 주다가, 쏟아지는 질문에 지쳐갑니다. 마침내 “뭘 그런 쓸데없는 걸 물어봐?!” 라거나 “그런 건 아빠한테/엄마한테 가서 물어봐”라고 대답을 회피합니다. 자녀의 질문은 점점 줄어듭니다. 어른이 될 수록, 질문을 안 합니다. 질문을 못 합니다.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왜?”라는 질문을 하기 멋쩍습니다. 아는 척 합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보다는, 질문 없이 익숙한 것을 반복하며 삽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왜?’가 있으십니까?
사회는 어떨까요?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회는,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원인을 분석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회는 원인 분석보다는, 사고를 일으킨 사람 또는 단체를 처벌합니다.
한국의 법의학자 이 호 교수님이 쓴,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호주에서, 간호사가 처방받은 약을 잘못 주사해 여러 환자가 사망했습니다. 개인의 실수가 아닙니다. 무려 대형 병원 5곳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원인은, 착각하기 쉽게 디자인 된 약병이었습니다. 제약회사 담당자를 모두 모아 사건을 설명하고, 약병 라벨을 바꾸라고 지시했습니다. ‘왜?’라는 질문으로 다음 사고를 막은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를 방송인 정영진 씨는 자신의 책 “정영진의 시대유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왜?’는 육하원칙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과 직접 연관이 없다. 사자에게 잡아먹힌 동료의 소식을 전할 때는 누가, 언제, 어떻게, 어디서, 누굴 공격했는지 등이 생존과 직결된다. 사고가 난 그곳에 다시 가지 않아야 하고 비슷한 동물을 만나면 피해야 할 테니까. 그러나 왜라는 질문은 생존과는 무관하다. 그러니 인간은 ‘왜’ 라는 질문과 함께 진짜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요즘에는 ‘왜?’라는 질문을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우리의 불안이 ‘왜?’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 일을 하는지.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제대로 살고 있는지 불안합니다. 불안을 이기기 위해, 지금까지 인류는 종교에 의존했습니다. 종교는 삶에 절대적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어떤 것이 선인지 아닌지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과학과 사상이 더욱 발전하며 절대적 기준이 무너집니다. 종교보다 과학과 철학에서 ‘왜?’의 답을 찾습니다. 문제는, 과학과 철학은 항상 변하는 가치라는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질문을 할 장소도, 사람도 찾기 힘듭니다. 질문을 해도, 그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를 이 학교에 보내는 것이 좋을까? 다들 과외 시키는데, 나도 그래야 하나? 이런 질문이 쏟아지지만, 답을 과학과 철학에서 찾기 힘듭니다. 최근 사람들이 찾은 방법이 AI입니다. AI에 질문하며 고민을 나누고 상담하는 일이 늘어납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합니다. “교회야말로, 무조건 믿으라고 하고 ‘왜?’라는 질문을 막는 곳 아닌가?” 저는 신앙과 성경에 의문이 있어도 질문 못하고 홀로 고민하며 방황하는 성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원래 교회는 폐쇄되고 질문이 금지된 모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답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에게는 손의 못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라고도 하셨습니다.
프란시스 쉐퍼라는 기독교 사상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 그래서 라브리(오두막)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깊은 토론과 기도를 경험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개인과, 사회와, 교회 모두 ‘왜?’라는 질문을 함으로 계속 성장합니다. 이 질문이 없으면 안됩니다. ‘왜?’라는 질문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인간답게. 깨어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해 줍니다. 성숙하게 해 줍니다. 답을 찾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우리를 멋지게 빚어가는 과정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 여러 질문에 대한 답을 교회에 와서 찾아보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교회는 사람들의 질문을 오랜 시간 동안 다뤘습니다. 시대는 변해도, 근원적 질문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 곳에서 ‘왜?’의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그 여러 곳에 교회도 포함해보십시오. 우리교회는 모든 분께 열려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답을 찾으시는 분들. 언제든 오셔서 그 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곳에서 찾지 못하셨던 답을 찾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 한 주도 모두 건강하고 평안하고 성장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