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를 읽는 사람은 제갈공명에 반한다. 유비가 삼고초려를 통하여 초야에 묻혀 있는 孔明을 끌어내고 공명은 유비를 도와 사천지방에 漢을 세운다. 역사에서 蜀漢으로 불리워지는 이 나라는 丞相 제갈공명이 싸움터에서 죽음에 따라 2代를 못 넘기고 亡한다. 중국 역사에서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위가 승상이다. 우리역사에서 보면 영의정이고, 지금으로 치면 총리와 같은 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이다. 중국역사에서 승상하면 제갈공명을 꼽는 것도 그가 짧은 기간이었지만, 최고 승상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三國志라는 역사서에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기술된 인물이다. 어떤 학자는 그 이유로 晋나라 史官 陳壽와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라고 한다. 진수는 三國을 통일한 魏를 승계한 晋 時代사람이지만 그 자신은 三國 당시 蜀人이었다. 진수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제갈공명 手下에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로부터 제갈공명의 이야기를 익히 듣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에 晋의 史官으로 임용되어 魏志, 吳志, 蜀志 등 3국의 역사를 쓰게 된다. 그가 기술한 三國志 역사서에서 蜀志가 가장 잘 기술된 것도 그만큼 자료가 풍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수의 三國志는 우리와 日本으로도 중요한 史書이다. 왜냐하면 중국 역사서에 우리나라와 일본(倭)이 처음으로 제대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三國志에서다. 三國志 중 魏志편을 보면 東夷傳이 나온다. 그 東夷傳속에 우리나라와 倭(일본)의 풍속이 나온다. 진수의 눈으로 보면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三國중 魏의 소수 민족인 東夷로 잘못 본 듯하다.
어쨌든 蜀(사천성)은 三國志를 쓴 진수의 고향이고 진수가 쓰고 싶었던 유비·제갈공명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본래 유비는 지금의 北京근처의 하북성 탁현 사람이었고, 제갈공명은 산동 출신으로 山東大漢답게 키가 컸다. 두 이방인이 의기투합하여 사천지방에서 벤쳐식 창업開國을 하였다. 제갈공명은 벤쳐 아이디어를 내고 유비는 벤쳐 캐피탈을 낸 셈인데, 그의 캐피탈은 皇族이라는 피(血)와 德이었다. 성공할 것 같은 이 벤쳐 국가는 아쉽게도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아쉬움과 함께 한, 중, 일 동양 3국 사람의 입에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제갈공명과 만두
우리들이 즐겨 먹는 饅頭라는 음식이 있다. 이 음식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제갈공명이다. 제갈공명은 文人이지만 전략가이므로 군사에도 뛰어났다. 그는 漢高祖 劉邦을 벤치메이킹하여 옛날 유방이 항우에 쫓겨가 칩거한 험준한 산악 漢中에서 起義하여 天下를 통일하듯이, 제갈공명은 오지 촉에서 起義하여 魏를 멸하고 天下를 통일코저 하였다. 그는 북으로 진령산맥을 넘어 中原으로 나가기 전에 먼저 남쪽의 소수 민족을 평정해야 했다. (南蠻征伐) 당시 소수 민족은 孟獲과 高定元등을 중심으로 하는 南越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들은 아열대 지역인 雲南정글을 근거로 게릴라전을 펴고 있었다. 七擒七縱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맹획을 일곱 번이나 잡았다가 일곱 번 모두 풀어주었다.
지금의 중국 정부가 55개 소수민족을 힘으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그 민족의 언어를 쓰게 하고, 풍속을 장려하는 회유정책도 사실은 孔明이 처음으로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孔明이 남월군을 추격중에 일어난 일이다. 지금의 운남성의 노수(瀘水)라는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 도저히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때 현지 점술사가 이 강에 거대한 용(猖神)이 살고 있는데 일년에 한 번씩 사람의 머리 49개를 제물로 바쳐야 노여움을 풀어져 강물이 잔잔해지므로 배를 띄워 건너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많은 사람 머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諸將들은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때 孔明은 그 다운 하나의 꾀를 냈다. 부하들로 하여금 밀가루를 가지고 오도록 하여 그것을 사람 머리처럼 만들도록 하였다. 그것을 人+曼首 또는 人+曼頭(蠻首 또는 蠻頭)라고 불렀다. 孔明은 과거 魏와의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을 부르듯이 하늘에 특별 제사를 지내고 나서 만두 49개를 강물에 집어던지니, 과연 폭풍과 파도로 요란하였던 강물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고 한다. 그 후 그러한 만두를 쪄서 식용하게 되었고, 글자도 식용이라는 의미로 사람(人)에서 먹는 모양(食)으로 변형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만두와 혼용되는 것이 餃子가 있다. 중국에서는 교자(지아오즈)와 만두(만토우)가 구분되는데 우리는 혼용해 쓰고 있다. 엄격하게 말하면 만두에는 속이 없다. 따라서 팥고물이 있는 우리의 찐빵이나 일본의 "만쥬"(饅頭)와도 다르다. 그러나 교자에는 속이 있다. 교자 만드는 것을 보면 우선 밀가루를 반죽하여 얇게 민 다음, 잘게 저민 고기나 야채 따위를 넣어 싸서는 그것을 수증기에 찐다. 야채며 고기가 다양하여 여러 가지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우리가 만두국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교자국이고, 찐만두라고 하는 것은 중국식으로 보면 바로 교자이다. 교자는 본래 고대 중국의 돈의 이름이었다. 우리가 옛날 돈을 엽전이라고 부르듯이, 중국에서 교자는 돈의 대명사였다. 중국 사람은 돈을 좋아하므로 음식도 돈처럼 만들어 먹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교자라는 것이 나왔다. 반달형 교자모습은 옛날 돈의 모양과 유사하다. 중국 사람은 설날에는 우리가 떡국 먹듯이 반드시 교자를 만들어 먹는데 만들 때 몇개는 일부러 진짜 동전을 넣어 만든다. 나중에 집 안 식구 누군가가 교자를 먹을 때 동전을 깨무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데 그에게는 그 해 돈복이 쏟아진다고 축하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