食在香港 (5) 滿漢全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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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在香港 (5) 滿漢全席

중국음식을 조금 알게 되면 흔히 듣는 말이 있다. 滿漢全席이다. 누구는 이것이 중국 음식의 대표라고 하고 중국 요리(cuisine)의 최고 표현이라고 한다. 우리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살아 있는 원숭이 골을 젓가락으로 파먹는 별난 요리(?)도 滿漢全席의 하나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희귀(奇特)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흰쌀로 만든 미음 죽도 있다. 이는 청나라의 康熙황제의 어명으로 만한전석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어느 해 겨울 강희황제가 사냥을 나갔다가 화살에 맞은 사슴(梅花鹿)을 황급히 쫓아가다 일행과 떨어지면서 길을 잃었다. 숲 속에 人家는 없고 해는 지고 황제라도 별 수 없이 허기진 배를 안고 터벅터벅 숲 속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어느 곳에선가 반딧불 같은 불빛이 새어나와 무작정 그곳으로 갔더니 눈먼 노인이 있었는데, 이 노인이 길 잃은 나그네에게 끓여준 흰쌀죽 한 그릇이 황제를 감동시켰기에 단순한 쌀죽이 滿漢全席의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滿漢全席에는 본래 200여 가지의 메뉴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차츰 간소화되어 지금은 3분의 1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만한전석을 모두 먹어보기란 쉽지 않다. 홍콩, 싱가폴 등지에는 만한전석을 먹어 보기 위한 契모임도 있다고 한다. 우리 돈으로 수 천 만원씩 불입하여야 하고 그 음식을 먹기 위하여 2∼3주간 휴가를 얻어야 한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시장이 반찬"이라 하루 세 끼 맛있게 먹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하루에도 세 번씩이나 진수성찬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먹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닐 수 있다. 人 는 자동제어장치(飽滿感)가 되어 있어 소화를 시킬 만할 때까지는 음식이 잘 들어가다가 그 度를 넘으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보아도 맛이 달아나고 더 이상 먹고 싶은 생각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滿漢全席을 다 먹기 위해서 음식에 걸 맞는 각종 茶를 마셔 소화를 돕게 해야하며 적당한 휴식을 주어야 인체의 자동제어에 걸리 않고 음식의 맛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먹어야 할 음식이 풍부하고 胃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가 가장 괴로운 때가 아닌가 한다. 한 때 서양에서 대제국을 이루었던 로마도 음식이 풍부했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로마는 유럽뿐 아니라 식민지 아프리카, 소아시아 등에서 올라오는 음식재료로 현지인 노예가 직접 만든 갖가지 요리는 로마의 귀족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들은 비스듬히 누워서 입 속의 향연을 즐기고 인체의 자동제어를 받지 않기 위하여 먹은 음식을 토(吐)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쉽게 토하기 위해서는 명주실의 한 끝에 작은 물체를 묶어 삼켜 두고는 그 실의 한 쪽 끝을 이빨 사이에 끼워둔다. 그리고 실컷 먹고 나면 제어 장치에 빨간 불이 켜지고 그 경우에 실을 잡아 당겨 위 속의 음식을 토해내었다. 그러고 나면 위가 다시 가벼워지고 새로운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고 한다. 滿 漢 同 治 滿漢全席은 청나라의 통치역사에서 기원되었다. 지금의 중국 요녕성 심양 부근을 중심으로 세력을 펴고 있던 후금(나중에 淸)은 산해관을 넘어 당시 明의 수도 北京을 칠 능력도 없었고 따라서 明을 정복하고 전 中國을 지배할 계획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明의 내분으로 이자성의 亂이 일어나고 그 후유증으로 山海關을 지키던 明장수가 뜻밖으로 淸에 歸順하면서 난공불락의 산해관 城門을 활짝 열어주고 만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 淸을 찾아 온 것이다. 淸이 山海關을 넘어(入關) 북경을 점령하고 나중에는 南京에 쫓겨난 明(후에 南明)의 잔존 세력을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백두산 산록의 일개 유목 민족인 여진족의 후예, 만주족의 북경입성과 천하통일은 그들에게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청의 엘리트들은 만주족과 유사한 유목민족인 몽고(元)가 중국 북쪽 몽고고원에서 내려와 지금의 北京지역에 大都라 하여 수도를 열고 중국경영 90년만에 단명으로 다시 한족(明)에게 쫓겨난 것에 주목하였다. 淸은 원나라가 몽고족 제일주의로 하고 피지배 민족인 漢족을 열등민족으로 통치한 것을 단명의 원인으로 분석하였다. 따라서 대제국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절대다수 漢族의 협조와 참여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고위직에는 한족에게도 만주족과 마찬가지고 동일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청조 260년간은 거대한 중국을 滿·漢 공동경영(同治)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와 문자에 있어서 만주족은 일찍이 漢化하여 소통에는 비교적 불편이 없었다. 그러나 음식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궁정연회(國宴)는 항상 滿式席과 漢式席이 구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滿式에는 유목민족답게 육류 중심의 간단한 요리가 많은 반면 漢式에는 야채와 생선을 위주로 하는 요리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연회에 참석한 고관들끼리 서로 초대해가면서 서로의 음식을 맛보도록 하게 됨에 따라 滿漢式의 음식 특징이 조금씩 없어졌으며 건륭황제부터는 강남 각 지방을 순방하면서 滿式이 漢式에 더욱 가까워졌다. 건륭황제는 滿式과 漢式을 한데 모아서 滿漢全席으로 이름을 짓고 새로운 메뉴를 계속 개발해 나가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순수한 궁정요리에서 시작된 滿漢全席이 사천·광주·복건 등 지방에도 보급된 것은 궁정의 만한전석에 익숙한 고관들이 지방총독으로 부임하여 그 지방에 유사한 만한전석의 요리를 만들어 내어 지방호족들에게 선을 보임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淸末 서태후 시대에는 지방호족까지 보급된 만한전석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일반 백성의 원성이 높아지자 그 폐해를 막기 위해 國宴 이외의 만한전석 요리를 내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 후 신해혁명으로 淸朝가 해체되자 권력을 잡은 軍閥 및 財閥들이 만한전석을 요리하는 방법(recipe)을 가지고 宮에서 나온 황실요리사를 고용, 만한전석요리를 먹는 것을 신분격상으로 여기게 됨에 따라 권력층·부유층 중심으로 만한전석이 새로이 유행했다. 만한전석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4인이 한 조가 되는 라운드 테이블을 반드시 사용하였다고 하며 亮·安·定·收의 4원칙도 지켜졌다고 전한다. 음식을 들기 전에 애피타이저로 미리 乾果, 水果 등 과일류를 준비하는 것을 亮이라 하고, 식사용구(찬구)를 잘 정리해 두고 그것을 맞춰서 사용하는 것을 安, 그리고 지위 高下에 따른 좌석배치를 定, 음식 하나하나가 끝나면 새로운 음식을 내기 위해 빈 접시를 오래두지 않고 재빨리 거두어 들이는 것을 收라고 한다. 현재 중국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보이는 몇 가지 관습이 滿漢全席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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