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가 사는 집 3
현미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건 내가 보내준 파일 수준이 아니다, 훨씬 더 많은 정보가 들어있다, 다혜가 열심히 만든 자료구나 싶었다. 순간적으로 질투도 났지만 보면 볼수록 파워포인트 자료를 정성스럽게 만든 것이 느껴졌다. 현미는 다혜 가정을 위해서 요구받았던 정보만 정리해서 보냈었다. 하지만, 이 PPT 파일은 홍콩에 살지 않는 사람도 이해하기 쉽게 직관적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사이완호와 타이쿠싱이 어디쯤인지 홍콩 지도로 먼저 소개하고 한국국제학교와 근처 델리아스쿨 같은 학교 정보도 들어 있었다. 마치 대학이나 강남 학군 소개하는 블로그 형태처럼 아이 엄마들의 감성으로 글을 써 놓았고 아기자기한 디자인도 더해져 있었다.
PPT 페이지를 넘겨 볼수록 다혜가 똑똑한 여자라고 인정하는 게 옳은 것 같았다. 그래, 이건 다혜가 잘 만든 작품이야, 도리어 칭찬해야 할 정도인걸, 속으로 마음의 정리가 되고 있었다.
그 순간 맨 마지막 장 아랫부분에 자그마한 글씨들이 있었다. 현미는 노안으로 작은 글씨는 잘 보이지 않았다. 두 손가락으로 크게 확대를 해보았다.
"아, 이게 뭐야! 얘가 뭐래니.."
마지막 몇 줄이 현미의 숨을 멎게 했다.
'만든 사람들 -
큰언니 현미&다혜&은영&현미&영아&주연 그리고 사이완호 타이쿠싱 멋진 엄마들.
처음 홍콩 정착에 큰 도움 주신 현미 님 넘 감사! 존경해요'
갑자기 눈물샘이 터져 버렸다.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순간 현미는 부끄러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복잡하게 엉키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었다. 다혜에게 건넸던 엑셀 파일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쏟아부은 것, 사진을 직접 찍어 정리한 것, 부동산에 몇 번이나 찾아가고 중간에서 통역했던 수고를 생각하며 화가 오를 만큼 올라와 있었다. 남편끼리도 서로 잘 친하게 지내도록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서로의 아이들을 돌봐 주었던 나날들이 한꺼번에 스쳐 갔다.
'내가 오해했었네, 완전!'
현미는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에 힘이 빠졌다. 소파에 털썩 기대었다.
몇 번이나 다시 읽어도 기분 좋은 글귀였다.
'처음 홍콩 정책에 큰 도움을 주신 현미 님 넘 감사! 존경해요'
그동안 홍콩에 정착하느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속앓이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녹여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나의 속 깊은 아픔을 이해해 줄 때 그 말이 짧은 글 한 줄이라도 이렇게 큰 힘이 되는구나 싶었다.
현미는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기해 준 다혜가 보고 싶어졌다. 속마음은 다 말 못 할 것 같았다. 오해했던 자신이 속 좁고 성급해 보일까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현미는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었다. 다혜는 신호가 몇 번 울리지 않았는데 바로 받았다.
"다혜, 나야, 정말 대단해. 네가 만든 파워포인트 봤어. 나 감동했잖니."
"아녀요, 언니가 다 알려준 거 여기 엄마들과 같이 정리한 거예요."
"어쩜 그리 예쁘게 잘 만들었어! 깜짝 놀랐잖아. 파워포인트 그렇게 잘해?"
"아니에요. 저는 진짜 정리만 한 거고요, 주위 엄마들이 갖고 있던 정보랑 인터넷에서 찾은 것들 내려받아서 정리한 거예요."
"나, 사실 오해했잖아. 내가 만든 거를 그냥 올린 건 줄 알았어."
"아~ 이게 다 언니 덕분에 시작된 거죠. 엑셀 파일 없었으면 시작도 못 했을 건데요. 언니 내일 맛있는 곳 갈래요? 한 곳 찾았어요."
"그래? 잘 됐다, 나도 다혜 만나고 싶었어. 내일 가자. 내가 다 사줄게!"
오해는 이렇게 시작됐다. 얼마 전 다혜가 포함된 한 모임이 아파트 근처 카페에서 있었다. 아이들 학교생활과 일반적인 얘기를 나누는 편한 자리였다. 모임이 끝나갈 무렵 우연히 지나가던 명희가 합석했다. 마침, 사람들은 다혜를 한창 칭찬하고 있었다. 다혜는 연신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며 아주 쉬웠다고 말했다.
"'집 구하기' 그거 정말 쉬운 거예요. 조금만 알아보면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저도 혼자 다 했으니까요."
명희는 다혜가 집을 구하는 것이 쉽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사실 그 뜻이 아니었다. 다혜는 '홍콩에서 집 구하기 타이쿠&사이완호.ppt' 파일 만드는 것이 쉬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오해는 명희 혼자 했다. 그러다가 자리가 자연스레 파했던 것이다.
(다음 주에는 홍콩의 워킹홀리데이 청년들의 눈으로 본 한인 사장님 이야기 '홍콩 워홀러의 외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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