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홍콩의 4대 토착민들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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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홍콩의 4대 토착민들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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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이주민의 도시다. 근대 개항을 통해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타지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홍콩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는 19세기 후이다. 

 

홍콩은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어 인구가 급증한다. 비록 금덩어리는 안 나오지만 미국의 골드 러시처럼 이주민들이 몰리며 도시도 번성하게 된다.


그럼 이전의 홍콩은 어떤 토착민들이 살고 있었을까? 

 

크게 4대 토착민으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광부인, 객가인, 학로인, 단가민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이었다.

 

1.   광부인(廣府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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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인은 본토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홍콩내에서 광동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다. 

 

원래는 중국 대륙에 거주한 사람들이었다. 진,한 시대이래로 고대 광저우 관할에 속하는 지역에 정착하였다. 

 

송나라 시기에는 전란을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북송 시기에는 여진족 금나라가, 남송 때에는 몽골 제국이 국토를 유린하여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남하한 이들은 신계 서북부의 비옥한 평야에 흩어져 둥지를 틀었다. 

 

지금의 윈롱 바닷가 인근, 그리고 깜틴 분지 및 판링과 성수이 분지이다.  이곳에 정착 후 주로 밭을 일구어 농경 생활로 생계를 유지했다.


등(鄧), 문(文), 요(廖), 후(侯), 팽(彭), 도(陶), 오(吳) 씨 일가는 송나라 때 이주해 온 일가인데, 지금도 뼈대 있는 가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신계에 거주하는 5대 성씨의 누군가를 만난다면 홍콩의 터줏대감으로 추켜세울 수 있다.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당시, 처음에는 홍콩 인근의 광저우 관할 지역에서 거주하였다. 

 

광부인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후 현재의 홍콩 지역으로 들어와 정착을 하게 된다. 

 

참고로 명나라 시기에 홍콩은 광저우 동관현에 속했다. 

 

1573년에는 동관현의 동부 지역에 신안현이라 부르는 행정 구역이 제정되었다. 

 

홍콩은 신안현에 편입되었고 청나라 때까지 이를 유지하게 된다.  


 

2.   객가인(客家人)


객가인은 필자의 칼럼을 통해 몇 번 언급되었다. 언어는 객가어를 사용한다 (물론 지금은 광동어 구사에도 문제가 없다). 

 

원래는 중원에 살았으나 진, 한 시기 이래 남향하여 광동의 북부 지역으로 거처를 옮긴다. 

 

원, 명나라 때에는 전란에 휩싸인 중원을 떠나 홍콩 지역까지 남하하였다.


객가의 ‘객(客)’은 손님을 뜻한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중국 곳곳에 정착해 살았기에 생활력이 강하고 억척스럽다. 

 

이로 인해 원주민들과 충돌을 겪는 일도 많았다. 홍콩에서의 생활도 역사적으로 순탄치 않았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광동성과 푸지엔성에는 해금령이 떨어진다. 

 

청나라 조정은 해금령을 통해 바닷가에 거주하는 인구를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대만으로 쫓겨 간 정성공을 위시한 명나라의 잔존 세력이 광동 및 푸지엔의 주민들과 결탁하여 청나라에 위협이 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1684년, 해금령이 해제되고 주민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나 객가인들 중 상당수는 옮겨 간 산지나 농지에서 계속 농경 생활을 하며 터전을 지킨다. 

 

이들은 신계 곳곳에 흩어져 살며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해간다. 이로 인해 제사, 종교 등에 있어 각기 다른 풍습을 유지해오고 있다. 

 

지금은 ‘객’에서 ‘주인’으로 완전히 신분이 바뀌었다.


3.   학로인(鶴佬人)로과 단가인(蜑家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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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로는 원래 복로(福佬)라고 불렸다. 조주어를 사용하며 황하강 일대와 낙수강 유역에 거주하였다. 

 

당나라 때 남쪽으로 이주하여 푸지엔에 정착하였고, 일부는 광동성의 조주 지역에 둥지를 틀었다.


학로인은 대부분 홍콩의 성수이 및 동부 해안 일대에 살고 있다. 

 

송나라 때 푸지엔에서 광동으로 거처를 옮긴 이들이다. 학로인의 이주 역시 전란을 피해서, 혹은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조선업의 기술도 익혀 배를 다루는데 능숙했다. 즉, 배를 만들어 바다에 나가 어업에 종사했다.


그중 일부는 내륙으로 들어와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였다. 

 

카우룬 시티에 구 학로촌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지금은 철거되어 복로천도(Fuk Lo Tsun Road)로 흔적이 남아있다. 

 

카우룬 시티와 프린스 에드워드로 연결되어 있는 도로다. 쳥챠우 섬에는 지금도 학로촌이 남아 있다.


단가인의 역사는 진시황의 진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나라는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패하고 백성들은 흩어진다. 

 

이후 주민들은 물고기를 잡고 가축을 기르며 강가에서 생활했는데, 이들을 ‘단(蜑)’이라 칭했다. 

 

숙식은 선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단가인들에게는 배가 곧 집이었다.


단가인은 토템 신앙에 의해 뱀을 신으로 모셨고, 스스로를 제왕의 자손으로 여겼다. 입수할 때는 몸에 있는 문신과 산발의 머리로 실제 용과 같은 모습으로 비춰졌다.  


당, 송 시대 때 단가인들은 대다수가 푸지엔과 광동에서 삶의 터전을 영위했다. 

 

진주를 캐고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했다. 광동의 동관, 신후이, 샹샨의 바닷가에 군락을 이루었다. 

 

홍콩 역시 바닷가 일대에 꽤 많은 단가인들의 거주지가 있었다. 

 

홍콩섬의 샤우케이완과 에버딘, 신계의 타이포, 사이쿵, 그리고 인근 도서 지역에 분포했다. 

 

도시가 발전하며 곳곳에 간척 사업이 이루어지자, 단가인들은 정부의 정책을 통해 내륙으로 이주하며 정체성을 잃어 갔다.


<참고 문헌>

香港古代史新編, 簫國建, 中華書局,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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