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우리말에도 있었을 법한 개념을 표현하는 데에 외래어가 쓰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분명 조선시대에도 사람들은 잔에 물을 따라 마셨을 테지만 지금 우리는 컵(cup)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과일을 짜서 나온 액체도 예전부터 마셔왔겠지만 주스(juice)라는 단어를 쓰고, 열쇠라는 말이 있지만 자동차 열쇠를 말할 때에는 거의 항상 차키(key)라고 합니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처럼 기존에 없던 개념이 새로 들어올 때에는 외래어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도 생기겠지만, 이미 우리말에 있는 개념을 표현할 때에도 외래어가 사용되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궁금해지곤 합니다.
주스는 중국어로 즙(汁)이라고 씁니다. 보통화로는 즤(zhī), 광동어로는 짭(zap1)이라고 읽습니다. 사진 속 통에도 한자로 포도즙(葡萄汁), 영어로 Grape Juice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한국어에서도 과즙, 사과즙, 포도즙 등의 단어를 많이 씁니다.
어감상 즙이라고 하면 농도가 진한 것, 주스라고 하면 농도가 옅은 것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광고에 "100% 원액 주스" 같은 표현도 나오는 것을 생각해보면 즙과 주스는 의미가 상당 부분 겹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국어사전도 주스를 과일이나 야채를 짜낸 즙이라고 설명하고 있지요.
汁은 '즙 즙' 자입니다. 먼 예전에는 순우리말 표현도 있었겠지만 어느 순간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려서 '하늘 천', '바다 해'와 같이 우리말로 뜻을 붙이지 못하고 한자 발음 그대로 '즙 즙'이라고 읽게 되었습니다.
汁은 뜻과 소리가 결합된 형성자로 왼쪽의 물 수(氵)가 뜻, 오른쪽의 열 십(十)이 소리 부분입니다. 모양이 비슷한 한자로는 땀 한(汗)이 있습니다. 획 하나 차이이지요. 땀 한 역시 왼쪽의 물 수(氵)가 뜻, 오른쪽의 방패 간(干)이 소리 부분입니다.
일본에서는 즙 즙 자를 국물이라는 의미로도 자주 쓰며, 그럴 경우 汁을 시루(しる)라고 읽습니다. 일본식 된장국을 미소시루라고 부르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국을 중국어로는 탕(湯)이라고 부르고, 한국어에서는 순우리말인 국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탕(湯)과 국을 보니 커피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커피를 처음 본 조선 사람들은 서양(洋)에서 들어온 끓여먹는(湯, 끓일 탕) 국이라는 뜻에서 커피를 양탕국(洋湯국)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