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文化 트레일 - 鄭和의 西洋 遠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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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文化 트레일 - 鄭和의 西洋 遠征

三宝老 후통 베이징(北京)의 명물의 하나는 후통(胡同)이다. 베이징의 뒷골목으로 역사와 전통이 녹아 있는 곳이다. 北京시 중심지인 西城區에 三不老胡同이 있다. 이 후통은 본래 三宝老 胡同의 이름이 바뀐 것이다. 즉 三宝 “할아버지”가 살았던 골목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三宝(또는 三保) 할아버지가 바로 600년전 1405년 明의 영락황제의 측근으로 황제의 명령을 받아 중국의 항해기술을 동남아와 동부 아프리카까지 알려준 정화(鄭和)를 말한다. 그는 서양에서 지리상의 발견보다도 100년 앞서 인도양과 아라비아해를 항해한 인물이다. 정화의 본명의 “馬三宝”라고 알려져 있다. 옛날 중국에서 馬씨 성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이슬람교도였다고 한다. 마호멧드의 “마”를 “馬“로 쓰였기에 마씨는 모두 一家로 이슬람교도 즉 무슬림인 셈이다. 또한 三宝는 정화가 스님들과 친하게 지내 불교에 관심을 갖게되면서 佛·法·僧의 三宝를 따서 별명으로 馬三宝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정화의 조상도 본래 무슬림으로 지금의 중국 신쟝(新彊)지역에 살았다고 전한다. 그의 조상은 그 지역을 점령한 몽고의 쿠빌라이칸과 함께 중국 운남성 원정에 참전하였다. 운남성을 점령한 쿠빌라이칸은 정화의 조상 등 신쟝지역의 무슬림을 운남성에 이주시켜 그지역의 한족 등 소수민족을 관리케 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년 후 몽고(元)는 주원장이 세운 明에 의해 다시 몽고 고원으로 쫓겨간다. 정화는 어린 나이에 明의 포로가 되어 운남성 고향을 떠나 수도 南京으로 잡혀와서 환관이 된다. 그후 정화는 황제의 4번째 아들인 燕王 주체(후의 영락황제)가 사는 北平(후의 北京)의 연왕궁에 배속된다. 建文帝 주원장에게는 장남이 있었지만 병약하여 일찍 죽는다. 그리고 장남의 큰 아들인 장손도 일찍 죽어 두 번째 어린 손자가 대를 잇게 된다. 주원장은 어린 손자보다는 연왕 주체에게 황위를 넘기고저 하였으나 明 개국 원로들이 반대하여 두 번째 손자를 황태자로 삼는다. 주원장이 죽고 그의 손자가 明 2대 황제로 즉위하는데 그가 建文帝이다. 연왕 주체는 어린 조카가 황위를 계승 한데 대해 즐거울리 없었다. 기회를 보기 위해 군비를 점검하였다. 북쪽으로 도망간 몽고(元)의 재침에 대한 준비뿐 아니고 남쪽의 조정에 대한 견제였다. 평소 연왕 주체의 성격을 잘 알고있는 明 태조 주원장은 원로대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어린 손자에게 황위를 계승시키게 되었지만 자신이 죽은후 다시 천하가 어지러울 것으로 내심 불안하였다. 황제의 유언 주원장은 죽기전에 황태자 손자를 불러 놓고 금박 상자 하나를 주면서 유언을 남긴다. 그는 황태자에게 이 상자를 평상시는 열어 보지말고 위난에 처했을 때 몰래 열어 보라고 시킨다. 명태조 주원장이 죽자 北平의 연왕 주체는 예상한대로 조카를 제거하고 스스로 왕이되려는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건문제를 옹립하고 있는 원로대신들은 이를 모를리 없었다. 그들은 주체의 날개를 꺾기 위한 방안을 생각하여 내었다. 주체의 연왕(藩王)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다. 元말기 한족의 이민족 배척의 내란 상황에서 정권을 잡은 주원장은 변방의 元지지 세력의 권토중래를 우려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자신의 아들들을 번왕으로 임명 大明제국을 지켜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번왕은 독립왕국과 유사한 형태로 스스로 군비를 정비하고 군을 훈련할 수 있어 때때로 실력을 키운 번왕은 중앙정부의 위협 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중 가장 우뚝한 세력이 北平의 연왕이었다. 南京의 중앙정부는 중앙집권강화와 왕권강화의 명분으로 번왕지위를 박탈하게 되면, 연왕 주체는 손발 없는 형국이 되어 버린다. 앞으로는 감히 南京의 수도를 넘어다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靖難의 변 번왕의 지위를 박탈하려는, 南京 정부의 이러한 낌새를 모를리 없는 연왕 주체는 결국 더 늦기전에 선수를 쳐야했다. 군사를 수도 南京으로 집결시킨 것이다. 역사에서는 ”정난의 변“이라고 일컫는 쿠테타이다. 즉 어린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역적을 멸하겠다는 대의 명분으로 남쪽으로 쳐내려간다. 北平 주둔의 연왕의 군대는 지금의 天津쪽으로 나가서 그곳에서 운하 등을 이용, 수도 南京까지 내려간다. 그후 연왕이 南京의 역적을 멸하고 天子가 되어서 다시 건너왔다하여 천진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일개 번왕이 이 나루를 건너 천자가 되어 돌아왔다는 의미다. 그때가 1404년이었으므로 2004년은 天津시 성립 600주년되는 해로 천진시가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하였다. 연왕주체의 군대는 보잘 것 없는 南京 보수세력을 물리치고 궁궐까지 육박한다. 어린 황제 건문제는 어쩔줄 몰랐다. 그사이에 선제 할아버지가 이야기 해준 금박 상자를 기억해 내었다. 상자를 열어본 어린 황제는 깜짝놀랐다. 상자 속에는 오래된 누더기 같은 스님의 옷 한 벌과 종이에 그려진 지도가 전부였다. 지도는 궁궐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비밀지도였다. 건문제는 황제복을 얼른 벗어버리고 스님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지도에 나와있는 비밀통로로 통해 궁궐을 빠져나갔다. 그 이후 황제의 소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궁궐을 점령한 연왕 주체는 당황하였다. 반드시 있어야 할 어린 황제가 사라진 것이다. 난리중에 죽었다면 시체라도 있어야 했다. 궁궐을 샅샅히 뒤졌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正史에는 건문제는 1402년 정난의 변에서 불타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연왕이 南京을 점령하였지만 民心은 흉흉하였다. 어린 조카로부터 황위를 빼앗기 위한 숙부의 반란을 좋게 볼리가 없었다. 연왕은 자신에 적대적이었던 보수세력의 잔존세력이 있는 南京에서는 황제에 오를 수 없었다. 더구나 진짜 황제는 무사히 피난하여 군사를 모아 역적 연왕을 물리치기 위해 황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 돌고 있었다. 北京 천도 연왕 주체는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北平으로 돌아왔다. 北平을 北京으로 고치고 정식으로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황제(영락)가 되었다. 몽고의 재침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보수하고 페허가 된 元의 大都의 궁궐 위치에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 지금의 자금성이다. 정난의 변에 참전한 정화는 건문제측의 환관과 내통하여 南京 함락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이미 연왕의 심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칙명에 의해 마삼보(馬三宝)에서 ”정화“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되었다. 영락황제는 조카 건문제가 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것이 여전히 찜찜하였다. 일부 소문에 의하면 건문제는 南京에서 배를 타고 양쯔강 하류로 빠져나가 동남아 어딘가 숨어서 권토 중래의 꿈을 가지고 군사를 모우고 있다고도 들려왔다. 영락황제는 악몽에 시달렸다. 언젠가 건문제가 돌아와서 南京의 보수세력을 규합하여 北京으로 쳐들어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동남아든 서남아든 해외 어딘가에 숨어있을 건문제를 찾아내야 했다. 아직도 민심의 절반은 영락 황제로부터 떨어져 있으므로 국력을 모우기 위해서는 건문제의 소재지를 찾아야 했고 그 뿌리를 없애야 했다. 그리고 북쪽으로 쫓겨간 몽고(元)군의 재침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남쪽(후방)이 안전하여야 했다. 정화의 서양 원정(下西洋) 영락은 자신의 심복인 정화를 불렀다. 정화는 무슬림(이슬람교도)으로 코란을 통해 아랍어를 익히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락황제가 파견코자하는 곳은 동남아·인도양일대로 그 곳에는 이미 이슬람교도가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서 무슬림인 정화를 파견할 경우 언어소통 등으로 현지인과의 업무협조에 유리할 것으로 보였다. 그에게 船團을 주어 동남아와 서남아 일대를 샅샅히 뒤지도록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정화는 南京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배를 만들고 정보도 수집하였다. 정화의 선단은 南京을 출발하여 지금의 上海쪽으로 나왔다. 당시의 지명으로는 류가항이었다. 정화의 지휘선은 돛이 많은 범선(宝船)으로 100척에 가까운 배를 27,0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린 대형선단이었다. 그때가 1405년이었으므로 꼭 600년전이다. 정화는 베트남을 지나 필리핀과 보르네오로 나왔다. 당시 지금의 인도네시아의 스마트라 섬을 경계로 섬의 서쪽을 서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일본, 필리핀쪽은 東洋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중국어 속에는 인력거를 東洋車라고한다. 이때의 동양이라는 말은 일본을 일컫는다. 정화는 서양으로 계속 나갔다. 인도양을 거쳐 지금의 아라비아 반도와 이란 사이의 ”호무르즈“ 해협으로 들어가 쿠웨이트 쪽까지 다녀 나온다. 그리고 다시 에덴을 지나서 홍해에 들어가 무슬림들의 성지인 메카를 방문하고 아프리카 동안까지 건문제를 찾아다닌다. “미스테리” 항해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정화의 서양 원정은 건문제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일부 학자는 이러한 건문제 추적 또는 체포설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오히려 정화의 항해는 영락황제가 大明제국의 국위를 해외에 펼치는 국책사업으로 시작되었다는 설명이다. 왜냐하면 건문제 추적 또는 수색이 목적이었다면 한번으로 충분한데 정화의 원정이 7차례나 걸쳐 있었고 마지막은 영락황제의 사후에도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리고 매번 수많은 군사와 대형 선단으로 “호호탕탕” 시끄럽게 다녔다. 건문제가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면 이소식을 듣고 더 깊히 숨기 좋도록 한 셈이다. 어쨋든 건문제를 찾아 나선 항해팀이 오늘날 중국의 항해술을 세계에 떨친 계기가 된다. 1405년에 시작한 항해가 평균 매 4년마다 출항을 한후 1424년에는 6번째 출항을 하였다. 그해 영락황제가 몽고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여 원정은 잠시 중단된다. 국력 낭비 등 이유로 원정 반대론자들이 영락황제 사후 들고 일어 난 것이다. 그후 1433년의 항해는 제7차이면서 마지막 원정이었다. 동 원정에서 정화는 62세의 나이로 귀국 도중인 인도 남부 해안에서 병사한다. 그로부터 정화의 원정은 사실 끝난다. 정화의 항해자료를 모두 불태우는 등 중국은 海禁정책으로 전환한다. 정화 선단은 많은 중국 사람들을 태워 나가 오늘날 화교 사회의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사람들은 정화의 선단에 자극을 받아 항해술을 익혀 100년 후에 “지리상 발견”에도 한 몫을 한다. “지리상 발견”으로 포투갈이 선박이 동 중국해에 나타나 마카오를 차지하고 나중에 아편전쟁까지 연결되는 서유럽 제국의 역습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정화의 강력한 선단은 주변의 많은 국가에게 해양세력 중국의 강력함을 선보이긴 했지만 땅을 점령한 것은 아니였다. 정화의 서양 원정은 요즘 말로 우호친선 항해였는지 건문제 수색이었는지 아직도 역사의 미스테리로 남아있다고 한다. 정화의 항해도 느닷없이 시작되었지만 정화의 죽음으로 갑자기 그만두었다. 그후 600년 가까이 한번도 그러한 항해를 해보지 못하였다. 정화의 서양 원정은 건문제를 찾는데는 실패했지만 정화의 28년에 걸친 7회 해양진출은 大明제국의 위상을 동남아는 물론 인도양까지 확대시킨 것은 틀림없다. 최근에는 정화가 컬럼부스보다 71년 앞서 미국대륙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는 책이 발간되는 등 정화의 해양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21세기의 정화 21세기는 중국의 세기라고 할 정도로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 부상하는 중국이 세계의 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에너지가 가장 큰 문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석유 수출국이었던 중국이 이제 에너지 자원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과거 건문제를 찾아나선 정화의 선단이 다녀왔던 해상로를 600년이 지난 지금은 에너지를 찾아나선 신중국의 선단이 동남아·인도양을 거쳐 중동의 호무르즈 해협까지 나가고있다. 호무르즈는 세계 석유생산의 40%가 통과하는 전략 지점이다. 최근 중국 총리의 인도 수상과 만남 등 인도양에서의 중국의 존재감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북아 전문가들은 중국이 대륙 세력에서 해양세력으로 뻗어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촉각을 세우고 있다. 외국의 신문 등에서는 벌써부터 “the dragon swims again"이라면서 정화이후 600년만에 중국의 해양전략을 보도하고 있다. 베이징의 三宝老胡同은 중국의 해양 진출과 함께 ”21세기의 정화“의 이야기로 다시 유명해질지 모른다. 유주열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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