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本家 : 廣州 (3)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콩의 本家 : 廣州 (3)

이 때 희생된 혁명당원 72인을 淸朝는 사형수가 묻히는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묻어버렸던 것을 익명의 화교가 광주의 白雲山(382m) 산록의 黃花崗 지역의 토지를 헌납하여 72명의 희생자를 合葬시켰다. 지금 그 곳의 도로를 先烈路라 부르고 "72열사의 묘"로 단장되어 있다. 그 해 11월 武昌에서의 무장봉기가 결국 성공하여 청조는 몰락하게 된다. 광주에는 72열사의 묘 근처에 "廣州起義烈士陵園"라는 또 다른 烈士의 묘가 있다. 이 烈士들은 1927년 12월 11일 중국 공산당 광주콤뮨이 무장봉기 하였다가 희생된 烈士들이다. 1927년은 중국공산당에서 가장 중요한 해로 그 해 4월 上海에서 백색테러라고 알려진 장개석 국민당에 의한 공산당원 기습체포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이른바 국공합작으로 북쪽의 군벌을 공격하고 있던 주은래 중심의 중국 공산당이 혼비백산 上海를 탈출하게 된다. 上海탈출에 성공한 주은래, 주덕 등이 8月1日 江西省 南昌에서 국민당에 대항 무장봉기를 하였다. 그날이 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이다. 그 무장봉기는 결국 실패하여 주은래 등은 인근 井崗山으로 도피하여 그에 앞서 들어온 毛澤東과 合流, 井崗山 투쟁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중국의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모택동에게도 광주는 중요한 곳이었다. 1926년 2월 모택동은 광주에서 농민운동 강습소 소장이 되어 광주에서 농민 운동을 직접 지휘했다. (열사능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습소 舊址가 있다.) 다시 중국의 窓 : 廣州→홍콩→廣州 아편전쟁 후 중국의 窓은 홍콩으로 옮아갔지만 사실 광주는 천년이상 중국의 窓의 역할을 해 왔다. 특히 淸朝에는 쇄국정책으로 국법으로 國外무역을 금하였으나 광주만이 외국인의 출입을 허용하여 광주가 명실공히 唯一窓의 기능을 다했다. 따라서 서방의 산업혁명의 파도와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의 파도가 중국 땅에서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바로 광주였다. 광주는 서방과 중국과의 문화적, 군사적 접점으로 격동기를 보낸 셈이다. 광주의 현재 人民路는 옛날 광주城의 서측 성벽과 일치한다. 人民路의 서쪽이 성 밖인 셈이다. 人民南路의 珠江변의 서쪽에 지금도 13行街가 있는데 이 곳이 중국과 거래할 수 있는 특허를 가진 13개의 외국회사가 있던 곳으로 이 일대가 합법적인 외국인 거류지역이었다. 明治유신 이전의 일본에도 나가사키에 데지마(出鳥)가 있어 이와 비슷한 기능을 하였다. 아편전쟁결과 중국에 많은 항구가 치외법권적 조계지로서 외부에 개항되었으나 이미 개항된 광주의 경우 珠江의 中洲를 매립하여 "沙面"이라는 조계지역을 만들었다. 가로 300m 세로 900m의 고구마 같은 沙面에는 지금도 서구 스타일의 건물이 많이 남아있고 광주에 주재하는 16개의 외국 총영사관의 일부가 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광주에 몇 남지 않은 1920∼30년대 4층 테라스 하우스식의 서양식 건축으로 이루어진 old town이 그대로 남아있고 아름드리 나무도 옛 풍취를 보여주고 있다. 홍콩 재벌 헨리 폭( )이 투자한 白天鵝 호텔은 沙面의 남쪽 미국총영사관 인근에 우뚝 솟아 호텔방에 드러누워 珠江에 오르내리는 크고 작은 배를 바라보면서 역사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沙面에서 다리를 건너면 바로 6·23路라는 길 표지가 있다. 이 길은 沙面과 뗄 수 없는 길이다. 이 길은 1925년 6월 23일, 홍콩과 광주가 연합 파업시위를 할 때 沙面의 영국 조계경찰의 발포에 의해 쓰러진 수많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길이다. 월수공원에서 광주 백운비행장으로 가다보면 三元里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그 곳은 抗英地로 유명하다. 지금도 抗英記念碑가 서있다. 밖으로 집들이 들어서 있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중영전쟁에서 중국은 신무기를 가지고 온 영국에 패전한 기록 밖에 없는데 三元里의 中英전투는 규모는 적으나 중국의 깨끗한 승리로 기록될 수 있는 곳이다. 1841년 5月 24日. 빅토리아 영국 여왕의 탄생일인 이 날을 맞아 주강의 영국 해군은 13行街에 상륙 광주성으로 육박하였다. 광주성을 지키던 정부군(청군)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 버렸다. 그렇지만 영국의 침략에 분개한 三元里의 주민들은 곡괭이, 삽, 몽둥이 등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영국을 평정하겠다는 의미로 "平英 "을 조직하고 군인을 대신하여 싸움에 나섰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싸움에 나선 平英團은 2만 정도 되었다고 한다. 平英 은 三元里 교외에서 영국의 마드라스 제37 보병단 1,000명을 포위하였고 그 때 마침 집중호우가 내렸다. 습기에 약한 프린트 총을 사용하고 있던 영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화약이 모두 젖어 격발이 되지 않아 총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三元里 平英 에 포위되어 死傷者를 많이 낸 영군은 긴급 휴전을 제의하고 三元里 주민에게 6백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고 한다. 無敵 영군을 겁내지 않고 분연히 궐기한 三元里 주민의 용감성을 돋보이게 하는 사건이다. 또 하나 광주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이슬람교도(淸眞)의 무덤이다. 월수공원 인근에 淸眞先賢古墓라는 곳이 있는데, 이 古墓가 바로 마호멧트의 외삼촌 묘라고 알려져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廣州가 외국과의 무역중심지이다 보니 7세기에는 사라센(大食國)에서 많은 商人들이 中國 즉 광주에 와서 무역을 하고 일부는 무역뿐 아니라 선교활동(missionary)을 위해 광주에 장기체류 하였다고 전한다. 이슬람교의 교주인 성현 마호멧트 집안도 무역업에 종사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어머니 형제가 광주에 使節로 와서 客死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믿기 어렵고 당시 이슬람 선교사의 무덤이 아닌가 생각된다. 광주에 가보면 7세기의 국제도시 광주의 榮華가 다시 돌아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홍콩과 마카오의 주권반환과 함께 광주를 중심으로 하고 홍콩과 마카오를 포함하는 거대한 주강 3각주(Great Pearl River Delta)가 하나의 지역공동체가 되어 다시 태어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左靑龍, 右白虎와 같이 좌측에는 심천-홍콩이 버티고 있고 우측으로는 珠海-마카오가 싸고 있으면서 광주를 돕고 있는 형상이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