香ケ峯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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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거리에 나타난 일본천황들 해가 바뀌어 1942년 봄, 일본은 홍콩의 장기 점령을 결정하고 홍콩에 일본총독을 파견한다. 磯谷가 초대 총독으로 부임하여, 센츄럴(中環)의 홍콩상하이은행(HSBC) 본점의 화강암 건물을 일본의 홍콩총독부로 접수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페닌슐라 호텔에 있던 군정청의 업무가 총독부로 이관되기에 이른다. 또한 황후광장의 빅토리아 황후상은 일군의 전리품으로서 일본으로 실려간다. (전쟁이 끝난 후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황후상은 제자리로 가지 못하고 지금의 빅토리아 공원에 재 안치됨.) 황후가 없어진 황후광장은 일본천황의 이름을 따서 昭和광장으로 바뀐다. 그 곳 뿐 아니라 Queensway는 메이지 도오리(明治通 ),케네디 로드와 알버트 로드는 다이쇼 도오리(大正通 )로 바뀐다. 소와덴노(日本王)의 아버지(大正)와 할아버지(明治)이름이 홍콩에 나타난 것이다. 구룡의 메인 스트리트 Nathan路는 돗토리 도오리(香取通 ), 보엔로드는 기리시마 도오리(霧島通 )로 바뀐다. 현재 퍼시픽 플레이스가 있고 홍콩파크가 있는 당시의 金鐘바라크(兵營)에는 일본의 神社가 들어섰다. 이름하여 南海神社. 지금은 홍콩 입법회의 건물로 쓰고 있는 석조전인 당시 고등법원 건물은 악명 높은 헌병 총사령부였다. 磯谷 총독은 영국 총독부(Government House)를 개조하여 총독관저로 꾸몄다. 홍콩을 하나의 일본식 城으로 생각했는지 香港城主 즉 총독이 거주하는 총독관저에 天守閣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총독관저 한 쪽에 높다란 다락을 올렸다. 지금도 Government House를 유심히 보면 당시 총독이 이상하게 만들어 놓은 天守閣이 아직도 그대로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가난하고 일자리 없는 홍콩거주 중국인을 모두 대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친일중국인만 살게 했다. 따라서 일본을 싫어한 많은 홍콩 기업인은 람씨 부모처럼 2차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을 표방한 포르투갈 領이었던 마카오로 피신하였다. 과거 영국인이 자키(경마)클럽을 만들고 영국인에게만 관람을 허용하였던 경마를 일본 점령군은 오히려 영국인은 완전히 배제시키고 중국인에게만 관람을 허용한다. 해피밸리 경마장은 100년만에 처음으로 영국인 한사람 없는 완전히 까만 머리 아시아인으로 만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은 나가사키·히로시마 원자폭탄으로 1945. 8. 15 무조건 항복과 동시에 모든 점령지에서 물러가게 된다. 세실 하코트 영국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8월 30일, 홍콩에 진주 일본 점령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1941년 12월 Young 총독이 펜닌슐라 호텔에서 항복을 한 후 3년 8개월만에 하코트 제독이 총독관저에서 일본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무정한 것인지 영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사카이(酒井) 사령관은 1946년 전범으로 취급 되어 남경의 이슬이 되었지만 하코트 제독은 현재도 우리나라 총영사관의 주소(하코트 로드)로 살아있다. 람씨의 50년 전 홍콩이야기가 끝날 무렵 昭和광장, 아니 빅토리아 스퀘어(황후광장)에는 네온사인이 밝아지고 있었다. 네온사인에는 이미 일본이 다시 온 것(君再來)처럼 일본상사, 제품광고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한 때 홍콩 돈의 절반이 일본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반증이라도 하는 듯 하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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