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물(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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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처음 와본 사람들은 아직도 홍콩의 많은 화장실의 수도꼭지가 그냥 틀면 쏴하는 것이 아니고 힘주어 한번 눌러야 물이 조금 나오고 금방 물이 끊어지는 것을 알게된다. 비누칠 한 손을 제대로 씻고 헹구려면 몇 번이고 신경질 나게 수도꼭지를 탁 탁 눌러야 한다. 무슨 홍콩 같은 국제도시가 물을 이렇게 아끼는지 하고 의아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시내 관광을 나가는 분은 홍콩에 화장실이 많지 않아서 적잖은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진짜 관광안내 잘하는 사람은 화장실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서 손님을 즉시 안내 할 수 있는 요령 있는 분이다. 대부분의 화장실이 외부에 개방되어 있지 않다. 열쇠 또는 요즈음 경우에는 비밀번호를 눌러야 화장실 문이 열리게 되어 있다. 홍콩에서 일류로 번듯한 사무실 경우에도 화장실의 잠금장치가 복잡하여 모처럼 찾아온 내빈들이 화장실을 스스로 찾아 갈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회의나 파티가 있는 날이면 내빈을 위해 화장실 안내 당번이 필요할 정도다. 왜 이렇게 되어 있을까? 한마디로 물이 귀해서다. 화장실 사용 후 훌래쉬로 쏟아내는 물을 아끼고자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화장실을 완전 개방 못하는지 모른다. 옛날부터 홍콩에 살아오신 분은 다행히 요즈음 홍콩시내에 공중화장실이 많아져서 옛날처럼 불편은 많이 줄었다고 한다. 홍콩의 물, 홍콩은 물 부족을 극복하면서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콩섬, 란타오섬 그리고 신계의 산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바위산 이라는 점이다. 마치 거대한 밥 사발을 엎어놓은 꼴이다. 그래서 홍콩의 雨期에 비가 바케츠로 쏟아 붓듯 해도 그 귀한 물이 모두 금새 바다로 흘러가 버리고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는다. 특히 홍콩섬은 더 가파르기 때문에 물이 잠기는 곳이 없다. 그래서 사람 뿐 아니라 식물이 살기에도 적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인이 홍콩섬에 유니온잭 旗를 꽂은 후 10년 가까이 된 1848년도 인구조사에 의하면 겨우 인구가 7백인 밖에 없었다고 한다. 7백인 정도라면 우물 몇 개로 식수 해결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후 10년이 지난 1858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구가 자그마치 9만에 육박하여 물 부족을 실감하게 되어 처음으로 홍콩섬의 저수지 공사를 계획하였다고 한다. 그때 시작된 것이 지금도 남아있는 포푸람 저수지이며 그 후 타이탐 저수지 공사가 이어졌다. 어쨋든 1860년대부터 꾸준히 저수지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여 홍콩 및 구룡에 모두 13개 저수지를 만들어 물 부족을 어느 정도 해결하였다고 한다. 홍콩의 물 부족이 심각해지고 시간단위로 식수공급을 할 정도가 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라고 한다. 일본이 1941년 12월 홍콩을 점령하면서 가장 걱정한 것이 식수와 식량의 부족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국 일본 통치자는 중국인의 과잉을 그 원인으로 보고 불요불급한 중국인들을 강제 귀향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고 한다. 일본군의 총 칼 아래 정든 집을 버리고 대륙으로 쫓겨간 중국인은 淸初 이후 제 2의 遷界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일본이 홍콩을 점령할 당시 150만의 인구 중 100만 명의 중국인을 대륙으로 강제 귀향 시켜 1945년 종전 당시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인구 50만 수준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자 강제귀향 된 중국인이 모두 復界한다. 인구는 다시 150만 이상 급증된다. 그런데다가 중국 대륙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4년 내전이 시작되자 전쟁 피난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유무역항인 홍콩으로, 홍콩으로 내려온다. 홍콩인구는 금새 3백만을 육박한다. 인구가 급증할수록 물 부족은 더욱 심각해 진다. 목욕은 말할 것도 없고 마실 물도 모자라서 물은 시간급수제가 되고 홍콩 변두리에는 물을 얻기 위한 양동이 장사진이 홍콩의 새로운 풍속도가 된다. 그리고 모두 물을 아낄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든지 강구하였다고 전해진다. 물이 나오는 곳에는 반드시 물을 아끼자는 "珍惜用水, 惜用滴水"의 유명한 구호가 나붙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단다. 물.물.물 물을 구해야한다. 결국 중국 정부를 설득하여 비싼 달러를 주고 심천의 물을 사들이기로 한다. 그러나 매년 가격을 흥정해야하고 사회주의 국가와 안정적인 계약을 할 수 없는 어려움도 따랐다고 한다. 또한 서방과 적대관계에 있는 중국에 식수를 의존하고 있는 것은 홍콩 안보 차원에서도 치명적이었다.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실컷 물을 써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런던과 홍콩에 근무하는 식민지 관리들의 자나 깨나 생각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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