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기획]시가총액 기준 세계 최대 부동산개발업체 선홍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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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획]시가총액 기준 세계 최대 부동산개발업체 선홍카이

[[1]] 우리에게 소 한 마리 훔쳐 가출해 현대그룹을 일군 정주영 회장의 신화가 있다면 홍콩에는 세계최대 부동산개발업체를 세운 날품팔이 고아소년의 신화가 있다. 바로 선홍카이 창업주인 궈더성이다. 날품팔이로 시작한 그는 지난 90년 69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전, 홍콩의 4대 부동산 재벌 중 하나였고, 그의 세 아들은 그 부를 8배로 키워 세계최대의 부동산개발업체로 만들었다. 올해 말, 홍콩 주룽(九龍)반도 남단의 오스틴가(街) 1번지에 118층짜리 ICC(국제상업중심) 빌딩이 완공될 예정이다. 해발 490m, 세계 4위 높이의 초고층 빌딩인 ICC는 사무실 면적만 250만제곱피트(약 7만평)이다. 102~118층엔 리츠칼튼 호텔이 들어서고 그 아래 모건스탠리와 도이치은행이 각각 16개 층과 13개 층을 쓰는 것을 비롯, 크레디트스위스·ABN암로·EFG은행 등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줄줄이 입주한다. 홍콩 최고층 빌딩인 ICC의 건물주는 선훙카이(新鴻基)부동산 그룹이다. 선홍카이(新鴻基)부동산창업자 궈더성은 입지적전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1911년 중국 광동성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양친을 잃은 그는 조부모의 품에서 자랐으나 열 살 때 이미 일자리를 찾기위해 베트남으로 갔을 정도로 불우했다. 이후 그는 광저우와 상하이, 또 일본까지 일자리를 찾아 떠돌았다. 그가 부를 일군 것은 2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였다. 전쟁을 피해 마카오로 피난간 그는 홍창수출입공사라는 무역회사를 차렸는데 ‘수입품 대왕’이란 별호를 얻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마카오에서 사업을 키운 그는 1958년 홍콩으로 진출한다. 처음부터 부동산 시장진출을 노렸던 궈더성은 리샤우키(李兆基)와 펑킹헤이(馮景禧)를 끌어들여 선홍카이 부동산의 전신인 융예(永業)유한공사를 만든다. 연장자인 궈더성이 회장을 맡아 현장을 직접 감독하고, 외향적이고 머리가 비상한 펑킹헤이는 자금 담당, 그리고 리샤우키는 디자인 및 토지구입을 담당했다. 이 3인조의 호흡과 사업감각은 비상한 것이어서 이들은 이후 홍콩 경제계의 신화적인 존재가 됐다. 그러나 1972년, 선홍카이 부동산(新鴻基地産)이 증시에 상장될 때 이들 셋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궈더성이 선홍카이를 지키고, 펑킹헤이는 증권회사, 그리고 리샤우키는 핸더슨 개발회사를 창립했다. 독립기업으로 다시 태어난 선홍카이부동산의 당시 직원은 30명, 등록자본은 홍콩달러 4억불이었다. 그러나 상장에 성공해 시장에서 직접 자본을 수혈받게되자 이후 선홍카이의 성장은 눈부시게 빨라졌다. 궈더성은 토지를 대량으로 매입하고 건물을 계속 지었다. 부동산 폭락이 오고 시장이 동요할 때도 그는 주저함이 없었다. 1967년 정치소요 사태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할 때도 샀고, 오일쇼크 때에도 샀다. 또한 80년대 들어 홍콩 반환에 대한 불안감으로 홍콩탈출러시가 일어났을 때도 그는 계속 부동산을 사들였다. 그리고 홍콩이 쇼핑객으로 넘쳐나던 시절에는 상가를 지어 팔고, 주택매매시장이 커지면 주택상품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건물을 지어 ‘건물제조공장’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선홍카이 부동산은 1980년대 초 홍콩 4대 부동산재벌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1990년, 궈더성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사업은 아들 궈빙샹, 궈빙장, 궈빙롄 삼형제에게 돌아갔다. 궈더성은 변변히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궈빙샹과 궈빙장은 런던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궈빙롄은 케임브리지대에서 법학박사를 받은 엘리트였다. 보통 2세 경영은 많은 문제를 낳기 마련이나 이들은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탕진하기는커녕 8배나 불려 오늘의 선홍카이 부동산을 만들었다. [[2]] 물론 삼형제의 공동경영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98년 여름, 청쿵그룹 리카싱(李嘉誠) 회장 맏아들인 리자가이(李澤鉅) 청쿵건설 회장과 선홍카이 그룹 맏아들 궈빙샹 회장이 조직폭력배 두목인 청체컹(張子强) 조직에 납치됐다 각각 약 1억3천만달러와 7천만달러(이상 미화)의 천문학적인 몸값을 내고 풀려난 일이 있었다. 이때의 충격으로 궈빙샹 회장은 정서불안 증세를 보였고, 때문에 이후 기업경영의 대부분은 두 동생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갈등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병세에서 회복돼 자신감을 회복한 궈빙샹은 2006, 7년 경 직접 경영일선에 나섰는데, 이것이 형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궈빙샹이 아이다 퉁이라는 여자친구를 선홍카이에 영입하면서 홍콩판 ‘왕자의 난’까지 벌어지게 된다. 아이다 퉁은 40대 미망인으로 궈빙샹과는 오랫동안 '미묘한 친분관계'를 갖고 궈 회장의 경영 결정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발휘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궈 회장의 두 동생은 아이다 퉁이 사업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보이기 전까지는 쿽 회장과의 관계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퉁이 궈 회장을 업고 경영진에 합류하면서 불화가 시작됐다. 아이다 퉁은 선홍카이 쇼핑몰 사업과 중국사업을 원했는데, 이게 격분한 궈 회장의 두 동생이 선홍카이 최대 주주인 어머니 퀑슈힝 여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에 이르렀다. 결국 2008년, 퀑 여사는 가족회의를 통해 궈 회장을 경영에서 물러나게 했다. 선홍카이 부동산은 홍콩 오피스 빌딩, 상업 빌딩, 아파트 등을 광범위하게 개발하고 있는 한편, 홍콩의 대표적인 토탈 통신업체인 스마톤, 홍콩의 노선 버스 경영권을 가진 자이퉁(載通), IT 기업인 신의망(新意網) 등을 산하기업으로 거느리고 있다. 선홍카이부동산(Sun Hung Kai Properties) ◈ 1972년 상장. ◈ 종업원수 31,000명 ◈ 사업 영역 : 부동산 개발 및 판매를 주업종으로 하고 있으나 호텔, 금융 서비스, 보험, 부도산 관리, 텔레커뮤니케이션, IT, 교통, 물류 사업 등을 망라하고 있다. ◈ 자산: 선홍카이 부동산은 홍콩의 가장 큰 토지 소유주로 4,400만 스퀘어피트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이중 1,800만 스퀘어 피트는 현재 개발 중이고, 2,600만 피트는 개발을 완료했다. 또한 신계지에 2,500만 스퀘어 피트의 농경지를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 신용등급: 스탠다드 푸어스 A , 무디스 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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