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 매고 당당히 지하철타는 베테랑 첼리스트 박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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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매고 당당히 지하철타는 베테랑 첼리스트 박시원




방역 조치로 인해 많은 공연이 취소되었을 것 같다. 어떻게 지내셨는지.

2020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에 심포니에타가 아시아투어를 가기로 되어 있었다. 베트남을 시작으로 태국, 한국 등 아시아의 나라들에서 공연을 시작하려는 찰나였는데 이틀 전에 연락을 받았다. Covid-19 확산세로 모든 일정을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실감나지 않았다. 이게 그렇게 큰 병인가 싶었다. 

매일 뉴스에서 속보로 나오자 아뿔싸 싶었다. 거의 6개월간 연주가 없었다. 공연이 없었으니까. 호두깍기 인형 공연을 매년 해왔었는데 올해 거의 25년만에 처음으로 취소가 됐다. 저희 심포니에타 뿐만 아니라 발레 측에서 엄청난 손해다. 방역조치로 제한됐던 관객 허용률이 50%에서 75%, 지금은 80%까지 가능하다.

팬더믹 속에서 공연계가 달라진 점이라면

공연이 없다고 가만히 있지 않고 단원들 간에 ‘나와라, 나와서 마스크 쓰고라도 연주하자’ 그런 분위기가 형성됐다. 관객은 없지만 우리가 공연을 스스로 녹화해서 보여주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렇게 관객없이 연주한 영상들을 모아 예술 독립영화 형식(Back on Stage 3 Destiny)으로 만들었고 극장에 상영하기에 이르렀다. 관객석에서 음악을 감상할 때보다 영화적 요소(줌, 크러즈업 등)가 가미되어 더욱 친밀하게 연주가들과 가까워지며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8월, 9월에는 자유롭게 연주자들이 참여해서 현대음악을 유튜브로 비공식 공연을 했었다. 연습은 연주자 각자가 집에서 화상회의 앱 줌(zoom)을 통해 했다. 각자의 영상을 편집해서 하나의 연주 영상으로 만들어 기념하기도 했다.

공연장과 관객들이 많이 그리웠을 것 같다

홍콩 클래식 관객들의 수준이 매우 높다. 관객들의 매너도 훌륭하다. 티켓팅을 상당수 개인들이 정기적으로 직접 구매한다. 한국은 아직도 대기업 후원으로 대량 판매한 뒤에 공짜 티켓을 뿌리는 경우가 많고, 사람들도 안 온다. 홍콩에서는 자기 구입이 많은 것 같다. 심지어 발레 공연에 매일 오시는 관객도 있었다. 매일 무대에 오르는 주연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느끼려는 것 같다.

팬데믹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라면?

당시 딸이 고3이었는데 기대하던 대학 입학, 캠퍼스의 설레임이 사라져서 무척 안타까워 보였다. 비대면으로 수업 받은지 벌써 1년이 지나 2학년이 됐다. 그래도 팬더믹 기간동안 도리어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되면서 가족과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서로 각자 바쁜 생활로 지내다가 갑자기 함께 있다 보니 자녀들과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서로에 대해서 더 이해하게 되면서 가까워진 것 같다.

남편분도 음악하는 분이시라고..

이스라엘 국적의 남편을 원래 미국 유학시절 만났다. 첫사랑이자 캠퍼스 커플이다. 남편이 1995년 홍콩필하모니에서 먼저 활동을 시작하면서 몇 년 뒤 심포니에타의 첼리스트 자리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저에게 추천했다. 유명 악단에서 자리가 나는 것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오디션을 보려고 날아온다. 미국이나 유럽의 필의 단원은 종신제라서 더욱 그렇다. 젊은 연주가들 중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지만 악단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전공한 남편은 현재 국제학교로 옮겨서 현악부를 맡아 가르치고 있다.

첼로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실 정도로 건강하고 활기차신데, 비결은?

남편과 하이킹을 시작했고 매주 일정하게 산에 올라 건강을 유지했다. 또 남편이 한참을 조사해서 찾아온 식단대로 서서히 바꾸었다. 간이 없는 요리로 염분과 각종 조미료를 줄여 나갔다. 아이들이 처음에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많이 적응해서 스스로 챙겨 먹을 정도다.



클래식 대중화를 위해 크고 작은 무대 가리지 않고 솔리스트 연주도 많이하시는데

미국 유학할 때 다른 가정처럼 여유있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법대를 졸업하시고도 뒤늦게 음악 공부를 하신 아버지가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주셨는데 안타깝게 돌아가신 뒤로 음대 교수셨던 어머니에게만 계속 의지할 수가 없었다. 미국 유학 때부터 장학금과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며 열심히 노력했었다. 지금도 계속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 건강관리를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 나의 연주를 기다리고 즐겁게 연주할 수 있는 곳이라면 흔쾌히 첼로 가방을 매고 갈 수 있다.


글/사진 손정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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