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연례 행사 7.1시위의 기원은 언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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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연례 행사 7.1시위의 기원은 언제부터?

 
 
7월 1일은 홍콩 반환기념일이며 공휴일이다. 

그런데 이날은 현지인들에게 ‘데모하는 날’로 인식되어 있기도 하다. 매년 이때가 되면 홍콩인들은 거리로 나와 정부를 향해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한 목소리를 드높인다. 그럼 7.1 시위 역사의 기원은 언제부터일까? 


사스와 침체된 경제, 그리고 기본법 23조


2003년 초, 사스가 강타하면서 홍콩은 재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스로 인해 당시 299명이 사망하였다. 여론은 정부의 위생부서에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라 질책하였고 결국 식품위생국장이 사직을 하게 된다. 

사스의 발발로 현지의 여행업과 소매업, 그리고 요식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중국으로 반환 이후 홍콩의 경제는 가장 심각한 상태에 직면한다. 실업율은 8.7%까지 치솟았으며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적지않은 중산층은 실업, 감봉, 자산 감소의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홍콩 정부는 2002년 말, 기본법 23조라는 화두를 던지며 사회를 들썩이게 한다. 기본법은 홍콩 사회에 헌법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데, 23조에 따르면 어떠한 매국적 행위나 국가 분열 행위, 국가 선동 행동을 금하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국가안전법을 입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일부 사회 인사들은 23조에 명시된 조문이 모호하여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할 수 있음을 우려한다. 

보안국장 레지나 입은 대학 등을 돌면서 정부의 정책을 설명하였지만 학생들의 반발에 부딪혔고 전체적인 사회 여론 또한 악화된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당시 행정장관이었던 퉁치화(董建華)가 이끄는 정부의 각종 정책적 오류는 매일 언론의 비판을 받으며 매체에 오르내린다. 

사스 사태 및 기본법 23조, 그리고 일부 언론사의 여론 분위기 조성 등을 통해 결국 2003년 7월 1일, 50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가두 행진을 벌이게 된다. 


행정장관 퉁치화의 사임으로 연결된 2003년 시위


경찰 집계는 35만명이지만 정부에서 헬기를 띄워 추산한 바에 의하면 67.5만명이었다는 기록이 나중에 밝혀졌다. 

경찰측에서 코스웨이 베이의 빅토리아 공원 정문에서 출발하는 인원을 시위 숫자로 인정한다고 발표하자, 시민들은 완차이와 코스웨이 베이 양쪽으로부터 집결하여 인파가 빅토리아 공원에서 동쪽의 포트리스 힐까지 이어진다.

시위대들은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며 퉁치화의 하야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기본법 23조의 입법화를 반대한다는 구호도 외쳤다. 그날은 최고 기온 33도까지 달하였고 폭염주의보까지 내려진 상태로 시위 도중 쓰러져 실려간 사람들도 발생하였다.

결국 7월 7일 새벽 1시 57분, 정부의 심야 토론을 거쳐 국가 안전 조례 초안 발표는 무기한 연기된다. 2004년 12월, 퉁치화는 마카오 반환 5주년 행사에 참석한다. 당시 중국 국가 주석이었던 후진타오를 접견하여 홍콩 실정에 대한 질책성 발언을 듣는다. 

결국  퉁치화는 2005년 3월, 건강상의 이유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퇴임한다. 그는 역대 유일하게 연임에 성공한 행정장관이기도 했지만 또한 유일하게 임기를 못 채운 행정장관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언론은 퉁치화의 사직이 2003년 7월 1일에 촉발된 대규모 시위로부터 귀결된 것이라 평하였다. 그리고 홍콩 민주 역사상 시민들이 일궈낸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매년 이어져 온 7월 1일 시위


 
이후 7월 1일은 시위의 날로 계승되었다. 2004년에도 약 20만명이 데모 행렬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2005년 3월 퉁치화 사임 후 같은 해의 시가 행진에서는 인원이 2만명 정도로 대폭 감소하였다. 자신들의 요구 사항 중 하나인 행정장관 사퇴가 관철되면서 그해의 시위는 비교적 조용히 끝난 것이다. 

그후 사회적 이슈에 따라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져 오다가 2019년 7월 1일,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다. 바로 송환법 문제로 한참 홍콩 사회가 시끄러웠을 때이다. 

주최측 추산 55만명, 경찰 추산 19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작년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7.1 시위 역사상 처음으로 경찰측에 의해 집회가 불허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가안보법이라는 사회적 이슈로 시위는 강행되었고 결국 경찰은 370명을 연행하였다.

올해는 그동안 민간 시위를 주도해 온  민간인권전선 측이 데모 주최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경찰로부터 무허가 단체로 지목됨에 따라 합법적으로 시위 신청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여전히 집회나 모임은 금지되어 있다. 상황이 좋지 않은 여건하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참여할 지는 미지수이다.

2003년 대규모 시위 이후 매년 7월 1일에 참여하는 시위대 숫자와 규모는 홍콩 민중들의 정부에 대한 지지도 및 사회적 욕구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우리가 7.1 시위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참고자료:
1.《圖解香港史》,周子峰,中華書局有限公司,2020
2. BBC New 中文https://www.bbc.com/zhongwen/trad/china/2013/07/130701_hk_71_rally_10years
3. Apple Daily
https://hk.appledaily.com/local/20140701/CSQPHYMNLRPSJDJMMIOODB53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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