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영국으로의 홍콩 할양은 오역(誤譯)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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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영국으로의 홍콩 할양은 오역(誤譯) 때문에?

 
 
 
 
다가오는 7월 1일은 홍콩의 중국 반환 24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영국으로의 홍콩 할양은 오역에 기인한 역사적 비화가 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산업 혁명 이후 영국은 방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면화를 대량 수입해야함에 따라 무역은 매년 적자였다.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에서 대량의 아편을 경작하게 했다. 그리고 중국에 아편을 유입시키며 폭리를 취한다. 

그러나 광저우가 중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였고 아편은 중국 정부로부터 합법화된 판매 상품으로 승인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는 영국 상인들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이때 청나라에서 흠차대신으로 파견된 임칙서가 후먼에서 2만 상자의 아편을 대량으로 소각하는 일이 발생한다. 1839년의 일이다.


아편전쟁에 대한 영국 의회의 투표 결과, 찬성 271 VS 반대 262

이에 대해 영국 의회에서는 군사적 행동에 대한 투표를 진행한다. 찬성 271표, 반대 262표의 근소한 차이로 영국은 중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전함 40여대 및 4,000여명의 군사가 홍콩섬 북쪽에 집결되었고 광저우를 봉쇄한 후 영국 측의 공격이 시작된다. 

영국 실무 책임자였던 찰스 엘리옷은 중국 정부에 손해 배상 요청 및 아편을 유입하는 항로를 확장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아울러 영국군 주둔을 목적으로 홍콩섬의 할양을 요청한다. 그러나, ‘할양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라며 청나라 정부로부터 거절을 당한다.  
 
엘리옷은 청나라의 책임자 치샨과 회담을 갖는다. 할양이 거절당하자 엘리옷은 마카오에서 서양인들의 자치 지역 사례를 들어 마카오 모델의 주둔지 제공 요청을 제안한다. 그리고, 영국군이 홍콩섬에 주둔하되 영토는 중국에 속한다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 요구도 거절당하자 엘리옷은 타이콕과 샤콕 지역을 점령 후, 주강 입구를 통제하는 무력 시위를 벌인다. 결국 치샨은 청나라 황제인 도광제에게 상소를 올려 엘리옷의 요구에 대한 재가를 요청하겠다는 뜻을 전한다. 



영문 번역시 ‘거주지 제공’이 ‘할양’으로 오역

그러나, 이때 영국 공사의 중국어 담당 비서가 치샨의 ‘거주지 제공(給予寄居)’을 영문으로 옮길 때 할양(cession)’으로 오역하게 된다. 엘리옷은 이를 보고 나서 바로 침사추이와 홍콩(당시 홍콩은 홍콩섬을 가리켰다), 홍함 등으로 샤콕을 대신하겠다는 회신을 보낸다. 

치샨은 홍콩의 주권은 마카오 모델을 따라 중국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황제에게 영국군의 주둔을 일정 지역내에서 허가해 달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엘리옷이 접한 영문 서신의 번역 문서에는 ‘cession(할양)’이라 쓰여 있었다. 기대 이상의 소득에 엘리옷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띤다. 

치샨은 이후 다음과 같이 회신을 보낸다. “침사추이 일대와 홍콩은 다른 지역에 속한다. 이곳들을 모두 허가해 달라고 조정에 요청하기는 어렵다.” 이는 곧 엘리옷으로 하여금 침사추이, 홍함, 홍콩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언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엘리옷은 홍콩을 요청해 온다. 


침사추이, 홍함, 홍콩섬 중 영국의 선택지는?

그런데 이와 관련된 세부 사항의 논의 없이 엘리옷은 1월 20일, 일방적으로 마카오일보에 영문으로 ‘홍콩, 영국왕에게 할양’이라는 기사를 내보낸다. 

또한 1월 26일에는 홍콩섬 서쪽에 위치한 수이항하우(水抗口)에 상륙하여 이곳을 ‘점령지(Possession Point)’라 명명하였다(헐리우드 로드에 인접한 이곳의 영문 지명은 지금도 포제션 포인트라고 불리우고 있다).  

2월 26일, 청나라 도광제는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즉시 치샨을 파면시켰고 두 나라 사이에는 다시 전운이 감돈다. 

영국 정부로부터 전권을 이임받은 헨리 포팅거는 8월 21일 37척의 전함과 3,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시아먼, 닝보 등을 점령한다(헨리 포팅거는 훗날 초대 홍콩 식민지 총독에 오른다). 그리고 1842년 6월, 인도에서 100여 척의 전함을 증원받아 샹하이 지역까지 진격한다. 

8월 4일, 남북 운수의 요충지인 난징의 성 앞까지 도달하게 되자, 29일에 난징 양쯔강 수역에 정박해 있던 콘월리스호에서 영국과 청나라는 남경조약에 서명한다.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한다는 내용은 세번째 조항에 등장한다. 



왜 홍콩이었을까

그럼 영국은 왜 홍콩을 점찍은 것일까? 일찍이 1816년, 영국 수행원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한 암허스트 일행은 홍콩에 대해 어떤 거대한 선박도 정박이 가능한 항구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당시 유일한 무역 통로였던 광저우는 수심이 얕아 큰 선박은 항구 밖에서 정박한 후 교역품을 작은 배로 옮겨 실어야 했으므로 비용이 많이 발생하였다. 

또한 홍콩섬은 당시 7,500명의 적은 인구였고 주강 입구로부터 가까웠으며 중국 당국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영국이 무역 중심지로 삼기에 이상적이었다. 

임칙서에 의해 광저우로의 아편 유입이 어렵게 되자, 영국 측에서 아편 밀수의 소굴로 삼은 곳이 홍콩섬 북부 지역이기도 하였다. 


홍콩섬 할양 후 18년 후에는 구룡이, 다시 38년 후에는 신계가 차례로 영국의 수중에 들어간다. 계약상 영국은 99년 이후에 신계 지역만 중국에 넘겨주면 되었지만, 홍콩섬과 구룡 점령에 대한 실효성이 떨어짐에 따라 1997년 7월 1일 자정 12시를 기해 세 곳은 모두 중국으로 반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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