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역사를 바꿀 뻔한 홍콩판 캐러비안의 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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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역사를 바꿀 뻔한 홍콩판 캐러비안의 해적




 
부하 7만을 거느린 해적의 거물 장보자이

홍콩섬에서 배로 약 35분 정도 떨어져 있는 청차우 섬에 들르면 한 번쯤 가 보는 명소가 있다. 해적 장보자이가 보물을 숨겨 놨다는 장보자이 동굴(Cheung Po Tsai Cave)이다. 

장보자이는 홍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해적 두목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 물어 보면 이름만 들어봤다고 할 뿐, 언제 어떻게 활동하던 해적인지 속시원히 얘기해 주는 홍콩인들이 없었다. 

그는 실제로 홍콩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의 거물급 해적이었다. 전성기 때는 무려 7만 명의 부하를 거느리기도 하였다. 장보자이는 홍콩사의 한 페이지뿐만 아니라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청나라 말, 중국 남부 연안을 위협하던 해적들 

장보자이의 본명은 장보(張保)로, 광동 신후이 출신이다. 1786년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15세 때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당시 청나라는 강희, 용정, 건륭의 3대 황제를 거치며 융성했는데 인구가 강희 통치 첫 해의 2천만 명에서 건륭 말년에는 3억 명까지 다다른다. 

그러나, 전답의 증가가 인구의 폭발적 팽창을 쫓아가지 못하는 데다가 중외 무역에 종사하는 인구의 팽창은 연해 지역에 해적을 양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보자이는 어린 나이에 어부로 활동하던 중 해적인 쪙이(鄭一) 무리에 붙잡힌다. 쪙이는 장보자이가 총명하고 말재주도 뛰어난 것을 발견하고는 그를 자신의 측근에 둔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장보자이는 두목급으로 올라서게 되며 쪙이는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인다.

장보자이는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함과 동시에 엄한 군령과 명확한 상벌로 부하들의 신임을 얻었다. 

예를 들면 약탈한 물품은 공동으로 운영하는 창고에 보관하도록 했는데 개인적으로 숨기다 적발되면 사형에 처하였다. 또한 마을의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부하가 있으면 역시 목숨을 구하기 어려웠다. 

장보자이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자 1808년과 1809년, 청나라 조정은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다. 

장보자이와 그의 부하들은 청나라군에 포위당하지만 곧 이들을 격퇴시킨다. 위협을 느낀 이 지역의 총독 바이링은 마을 주민들이 해적과 결탁하는 것을 엄금하였고 주변에 포대를 증설하기에 이른다.  



청나라·포루투갈 연합군과 대격전을 치르는 장보자이의 해적들

한번은 포루투갈의 상선 세 척이 이 일대를 지나다 이싸우(一嫂, 쪙이의 아내)가 이끄는 해적들에 한 척이 붙잡히고 다른 두 척은 도망치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 샹샨현에서 백 척의 배를 거느리던 청나라의 지휘관 펑슈는 도망친 두 척 및 포루투갈의 다른 6척의 배와 합세해 이싸우 무리의 토벌에 나선다. 이로 인해 이싸우는 장보자이에 도움을 청한다.

장보자이는 부하들을 이끌고 바로 출항한다. 한바탕 대격전이 펼져진 끝에 장보자이는 포루투갈과 펑슈가 이끄는 수군을 대패시킨다. 이 사건은 청나라와 포루투갈로 하여금 장보자이를 공공의 적으로 여겨 토벌을 위한 본격 연합 전선을 형성시키게 하는 도화선이 된다.  

1809년 11월 17일, 펑슈는 전열을 가다듬고 포루투갈 선함 6척, 쑨취엔모우가 이끄는 백 척의 세력과 합세하여 장보자이를 잡으러 출정한다. 당시 장보자이는 란타우 섬의 첵랍콕 일대에 집결해 있었다. 

11월 20일, 청나라·포루투갈 연합군과 장보자이 무리는 첵랍콕 해상에서 9일간의 대격전을 치른다. 첫 이틀간은 밤낮을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는다.

24일, 연합군의 쑨취엔모우는 자신이 이끄는 선함을 첵랍콕에 집결시키고 펑슈로 하여금 육군을 파견하여 통총 일대에서 진지를 구축한 후 수륙 양면 공격을 취하는 전략을 수립한다. 

그리고 화공 작전을 펼쳐 섬멸하려 하였으나 바람의 저항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한다. 29일, 장보자이는 불어 오는 남풍의 기세를 빌어 100여척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도망친다.


역사학자 “해적 출신들을 중용했다면 아편전쟁의 결말이 바뀌었을지도”

이들의 리턴 매치가 펼쳐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2월 11일이었다. 관군의 80여척에 장보자이는 일자 횡렬 대형으로 맞선다. 

장보자이는 풍부한 해전 경험을 바탕으로 야간 작전을 펼쳐 관군의 배 두 척을 태우고 세 척을 포획한다. 결국 힘에 부친 쑨취엔모우의 토벌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관직에서 박탈당한다.                                  

장보자이 세력을 섬멸하는데 실패한 청나라 조정은 회유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장보자이가 투항하면 그에게 관직을 내린다는 것인데 귀순한 다른 해적의 두목에게 이와 같은 정책을 본보기로 적용하였다. 

결국 1810년 4월, 장보자이는 마카오에서 부하들과 함께 투항한다. 청나라는 그를 다른 해적을 토벌하는 선봉에 세우고 이에 힘입어 남부 지역의 해적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장보자이는 공을 인정받아 푸지엔 등에서 관직 생활을 한다. 1821년, 총사령관의 위치에 오를 기회가 있었으나 해적 출신이라는 이유로 반대의 상소를 올린 린저쉬(임칙서)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한다. 

린저쉬는 훗날 아편 밀수를 뿌리뽑기 위해 흠차대신으로 파견되어 대량의 아편을 불태워 버린 인물인데, 영국 측에서 이를 빌미로 아편전쟁을 일으킨다.

역사학자 차이쓰싱은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청나라 조정에서 해전 경험이 풍부한 장보자이와 해적들을 중용했다면 훗날 아편전쟁의 결말은 다시 쓰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의 패배로 난징조약을 통해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게 된다.

 
 
참고자료: <<香港史100件大事>>, 蔡思行, 中華書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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