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홍콩의 일제 시대, 항일 미션 임파서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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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홍콩의 일제 시대, 항일 미션 임파서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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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8개월간 이어진 홍콩에서의 일제 시대


얼마 전 한국에서는 광복 78주년 행사가 진행되었다. 

 

비록 다시 영국의 통치하에 편입되긴 했지만, 홍콩 역시 일제 시대의 역사가 있다. 

 

진주만 폭격이 있었던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일본 제국주의는 마카오와 홍콩을 동시에 침공한다. 

 

주로 영국군과 캐나다군으로 구성된 연합국은 힘겹게 맞서 싸웠으나 결국 12월 25일, 항복을 선언한다. 

 

영국은 항복을 인정하는 문서에 사인을 하고, 일본의 군사령부로 점유된 페닌슐라 호텔에는 일장기가 펄럭였다.


이후 홍콩은 1945년 8월 15일까지 3년 8개월간의 일제 시대를 맞는다. 

 

이 기간은 홍콩 역사의 암흑기에 해당한다. 

 

일본 점렴 이전의 홍콩 인구는 160만이었으나, 광복 당시에는 60만까지 줄어들었다. 

 

일제는 물자와 식량을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자국 병력에 공급하기 위해 수많은 현지인들을 중국 대륙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 때 애국 투사들과 민초들이 중심이 된 독립 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홍콩 역시 치열한 항일 운동 활동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홍콩의 항일 운동중에는 특별한 임무 수행과 활동들이 전개되었다.


 

중국 공산당에 의해 조직된 항일 부대


홍콩 항일 운동의 특징은 중국 공산당의 주도하에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1938년 1월, 중국 공산당의 최고위급 간부였던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홍콩에 팔로군 연락 사무소를 설치한다.

 

 팔로군은 중일 전쟁 발발 후 중국 공산당이 설립한 항일 부대를 말한다.


광동 지역 또한 유격대의 항일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홍콩이 함락된 후 기존의 유격대는 ‘동강군단’의 명칭으로 재탄생하였다. 

 

이중 동강군단의 깃발 하에 활약한 구룡-홍콩 대대는 유명한 항일 부대였다. 주 활동 무대는 샤우타우콕, 타이포, 윈롱, 사이쿵 일대였다. 

 

항일 무장군의 구성원은 총 80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의 해상 통로를 끊기 위해 해상 유격대도 설립하였다. 

 

이들은 물자를 실은 선박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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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 1 - 영·미 조종사를 구출하라!


홍콩에서 진행된 항일 운동은 일본군과의 유격전 외에도 연합군과 문예 인사들의 탈출을 돕고 정보 수집 등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일본과 총격전을 벌인 주요 군사 활동으로는 카우룬 베이와 사이쿵의 일본 기지 습격을 들 수 있다. 1944년 4월의 일이다. 

 

같은 해 5월에는 일본의 공군 기지로 이용된 카이탁 공항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홍콩의 항일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은 연합군 조종사를 탈출시키는 임무 수행이었다. 

 

라이드 대령이 이끄는 4명의 영국국은 투항 후 삼수이포의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이들이 수감된 곳은 부두 인근 지역이었다. 항일 부대의 대원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영국군을 무사히 빼돌리는데 성공한다. 

 

이때 홍콩 어민들의 협조가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군은 제 14항공 부대를 통해 수차례 카이탁 공항에 폭격을 시도한다. 

 

항일 부대원들은 일본군에 피격되어 낙하산 탈출을 시도한 미군 조종사의 탈출 작전에도 기여한다. 

 

일본군 또한 도피하는 조종사를 찾아내기 위해 수색을 진행하는 긴박한 상황들이 벌어진다. 

 

낙하산을 타고 산으로, 바다로 떨어진 조종사들을 누가 먼저 찾느냐에 탈출자들의 목숨이 오갔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942년 1월부터 1945년 초까지 홍콩 독립 부대는 약 백여 명의 영국과 미국의 전투기 조종사를 탈출시켜 중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미션 임파서블 2: 8백 명의 문예 인사들을 탈출시켜라!


홍콩 항일 운동의 백미는 문예 인사 탈출 작전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던 모순(茅盾) 등 좌파 문예 인사들은 전란을 피해 홍콩으로 대거 이주한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홍콩 침공이 발발하자 저우언라이는 홍콩 팔로군 사무소의 랴오청즈에게 지시하여 이들을 동강 유격지구로 안전하게 대피시키라는 임무를 하달한다. 

 

광동인민항일유격대는 제 3 대대와 제 5대대를 중심으로 독립 대대를 결성, 문예 인사 구출 작전에 나선다.


랴오청즈는 1차적으로 이들을 동강 유격지구로 대피시킨디. 

 

그리고 국경을 넘어 중국 대륙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두 가지 탈출 노선을 설정한다. 

 

하나는 서부 지역으로 이동하는 노선인데, 구룡에서 출발하여 췬완의 다이모산, 윈롱을 거쳐 록마차우로 건너가는 경로이다. 

 

다른 하나는 동부 노선으로, 사이쿵에서 배를 타고 다이팡완을 통해 중국으로 탈출하고자 했다. 

 

유격 부대의 근거지가 사이쿵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사들은 동부 노선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어부들에게 돈을 쥐어 주며 바다를 건넜다. 

 

이후 며칠간 창고에 숨어 지내는 등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엑소더스의 여정을 함께한다. 

 

결국 8백명 모두는 탈출에 성공하는데, 이는 홍콩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조 활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콩에서 무장 항일 운동에 가담한 독립 투사는 2021년 기준 58명이 생존해 있다. 

 

<홍콩에서의 전투>라는 책을 출판한 홍콩의 역사학자 야우얏은 주장한다. “젊은이들의 기억 속에 이 당시의 역사는 공백 상태로 남아있어요. 우리는 항일 운동 인사들을 교육 현장으로 이끌어 역사를 들려주도록 해야 합니다” 


참고 문헌 :

《香港史100件大事》,蔡思行,中華書局,2014

《圖解香港史》,周子峰,中華書局有限公司,2020

《香港故事》, 閔捷, 三 聯書店有限公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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