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팬데믹과 경기불황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업종은 관광업일 것이다. 국경이 닫히면서 여행사는 줄줄이 폐업을 하고 그 많던 한국인 가이드들도 상당수 한국으로 들어갔다.
남아 있는 가이드들은 식당이나 다른 서비스 업으로 이직해야만 했다.
홍콩에서 37년간 살아온 베테랑 가이드 이수림 씨도 우울증을 피할 수 없었다.
바쁘게 일하며 살아왔는데 반정부 시위와 코로나 때문에 평생 직업이 멈춰버렸다. 그러다 보니 우울증 비슷하게 뭔가가 찾아왔다.
집에 강아지 한마리, 고양이 한마리가 있어서 그 녀석들 뒤치닥거리 해준다고 해도, 해야 할일이 없어져 버린 것 같아 공허했다. 59년생이라 나이도 어느 정도 들었다.
여행업이 아니면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다. 의욕은 있지만 나이 때문에 누가 날 써줄까.. 아직도 내 마음은 40대인데 하지만 (나이) 숫자만 보면은 뭐든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의 삶을 활기있게 바꿀 수 있을까 고민했다. 생계가 아니라면 용돈이라도 벌 수 있는 일을 해야하나.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소위 '멘붕'이 온 것이다.
홍콩에서 살아온 삶을 접고 한국으로 귀국해야 하나. 한국에 가서 내가 꿈꿔왔던 정원주택을 사서 집앞에 텃밭을 일구고 살아갈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금방 생각이 또 바뀌었다.
37년간 홍콩에서 살아왔는데 어떻게 접고가나. 내 딸도 여기에 있는데. 한순간에 접고 간단 말인가. 이건 아닌데.. 혼란의 시간은 끝이 없어 보였다.
어느날 딸에게 넋두리처럼 마음속 얘기를 털어 놓았다. “엄마는 공기 좋고 산들바람 부는데서 야채 씨앗뿌리고 흙 만지면서 앞으로의 삶을 살고 싶어. 그럴려면 한국으로 가야하는데...”
엄마의 고민을 귀담아 들은 딸은 어느날 “엄마, 엄마가 하고 싶은대로 살아. 한국으로 가고 싶으면 이 집 팔아서 한국 가도 돼요. 나는 전혀 신경 쓰지마.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테니까, 그냥 엄마가 하고 싶은데로 하고 살아요”라고 말했다.
엄마를 걱정하는 말에 수림 씨는 큰 위로를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하나밖에 없는 딸을 두고 갈수가 있나.. 한국에 혼자 가서 다시 이 나이에 새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
주저하는 모습에 딸은 묘안을 냈다. “엄마, 지금 바로 귀국할 정도가 아니라면 홍콩에도 도시 외곽에 텃밭을 가꾸는 곳이 있어. 내가 알아볼게”
그러더니 바로 토요일 아침 윈롱 바로 전역인 MTR 깜송로(錦上路) 역 부근의 주말농원을 찾아내 데리고 왔다. 2019년 12월 겨울이었다. 한달에 몇 백 홍콩달러로 몇 평 크기의 텃밭을 빌려 마음껏 심고 싶은대로 심어 나만의 밭을 가꿀 수 있었다.
직접와서 보니 수림 씨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 여기에 있었다. 복잡했던 홍콩의 도심과 완전 딴 세상이었다. 한국의 어느 농촌 시골 풍경과 아주 흡사했다.
수림 씨는 이곳에서 드디어 숨통을 트는 것만 같았다. 코로나의 어려운 시기를 여기서 이겨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코로나가 지나면 다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오겠지, 그때까지 건강하게 나 자신을 가꾸자고 다짐했다.
한국 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니까 이곳에서 이겨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막상 주말 농장에 들어와 비어있는 텃밭을 보니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좋은 자리는 이미 꽉 차고 딱 한 군데만 남아 있었다.
샛물이 흐르는 도랑 바로 옆이었다. 모양도 삐뚤하게 생겼지만 상관없었다. 바로 계약하고 텃밭을 정리하려고 소매를 걷어 부쳤다. 주인은 잡초 제거하고 흙을 정리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수림 씨는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처음부터, 정말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남의 도움 없이. 할 수 있다, 난 다시 할 수 있다,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듯 텃밭을 고르고 정돈했다. 주인도 놀랐을 것이라고 수림 씨는 말했다. 남자가 해야할 거친 과정인데 억척같이 혼자서 다 땅을 골라냈으니.
‘쪼가리’ 땅이지만 너무나 기뻤다. 그때의 첫 감정을 잊을 수 없었는지 한참을 기억해 냈다. 아무나 못할 거라면서, 자신이 해낸 것에 만족감을 보였다.
주위에서는 한심하다는 반응도 있었다고 한다. 한달에 300~400홍콩달러내고 그 고생을 해서 야채를 먹냐고, 그냥 수퍼에서 사먹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수림 씨에게는 속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이곳이 얼마나 내 자신의 힐링이 되는 곳인지, 이곳에서 일궈낸 작은 야채 한 줄기가 얼마나 보람찬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 넘치는 곳이었다. 마음속 행복을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었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텃밭이 좋고 행복했다.
어느날 다른 홍콩인들이 김치를 만들 줄 아냐고 물어왔다. 김치 담는 것이라면 누구한테도 아쉽지 않았기에 배추값만 주면 알려줄게 하며 자의반타의반 김치 클래스가 열렸다.
주말농원에 마련된 야외 공간에서 홍콩인들을 대상으로 시도했는데 반응이 너무나 좋았다. 딸은 곧 인스타그램에 김치 클래스를 알렸다.
도심을 벗어나 야외에서 김치를 만들고 싶었던 홍콩인들이 하나 둘 문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김치 담기 교실을 열고 있다.
바로 옆에서 텃밭을 담구는 홍콩인들과 친구가 되고, 김치 담그기로 친구를 사귀고, 자꾸 친구들이 생기면서 삶의 활기가 생겼다. 남편과 사별한지가 거의 10년이 되가는데 딸의 지혜로 삶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한 거는 딸을 낳은 거에요. 딸이 바르게 (이름대로) 지혜로운 아이로 잘 자란 것 같아서 정말 행복해요. 지금도 세상을 얻은 기분이에요.”
해질녁 햇살에 비친 수림 씨는 텃밭하면서 너무 행복해요. 내 세상이에요”라며 어린 소녀처럼 신나 보였다. 한 시간 넘게 함께 쪼그리며 앉아 말동무를 했기에 상추, 깻잎 한 바구니 얻을 수 있었다.
글, 사진 | 손정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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