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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는 한국어나 중국어나 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쓰지만 근대 이전에는 모든 한자 문화권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썼습니다. 정확히는 오른쪽에서부터 한 줄씩 세로로 글을 썼지요.
그러다가 근대 이후 점차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로 글을 쓰는 좌횡서(左橫書)가 널리 퍼지게 됩니다. 대략 인구의 85%에서 90%가 오른손잡이라고 하는데,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것이 오른손잡이에게 편하다 보니 좌횡서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서울의 독립문에 ‘문립독’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듯 홍콩에서도 가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 우횡서(右橫書)를 볼 수 있습니다.
홍콩 섬 센트럴에는 1956년에 건설된 에든버러 광장(Edinburgh Place)이라는 광장이 있는데 이 근처를 지나던 중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인 표지판을 보았습니다. 에든버러 광장은 한자로 愛丁堡廣場(애정보광장)이라고 쓰는데, 이 간판에는 글자를 오른쪽에서부터 썼기 때문에 場廣堡丁愛(장광보정애)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에든버러를 애정보(愛丁堡)라고 쓰는 것이 조금 어색해 보이는데 광동어 발음으로 읽어 보면 응오이딩보우(ngoi3 ding1 bou2)가 되어 에든버러와 약간 더 비슷하게 들립니다.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의 수도이자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기도 한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영어의 burgh, 독일어의 burg, 프랑스어의 bourg는 단어 뒤에 붙어서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라는 뜻을 나타내는데 따라서 에든버러(Edinburgh)는 에든(Edin)에 있는 성곽 도시(burgh), 독일의 함부르크(Hamburg)는 함(Ham)에 있는 성곽 도시(burg),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Salzburg)는 소금(Salz, 독일어로 소금이라는 뜻) 성곽 도시(burg)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성곽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계층을 프랑스어로 bourg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bourgeoisie라고 불렀는데 이 단어가 역사 속에서 뜻이 바뀌어서 지금의 부르주아가 되었습니다.
애정보광장(愛丁堡廣場)의 애정보(愛丁堡)는 아마도 에든버러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음차이겠지만 버러(burgh)에 해당하는 한자로 보(堡)를 고를 때에는 뜻도 신경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보(堡)는 보루(堡壘), 교두보(橋頭堡), 강화도의 광성보(廣城堡) 등에서 보실 수 있는 글자로 작은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든버러의 버러(burgh)는 작은 성이 아니라 큰 성곽이지만 그래도 영어 명칭을 중국어로 옮길 때에 발음의 유사성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하게 한자의 뜻을 맞추었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