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홍콩의 중국 반환, 그 막전 막후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홍콩의 중국 반환, 그 막전 막후

Hong-Kong-Handover1.jpg

 

오는 7월 1일은 홍콩의 중국 반환 26주년이 되는 날이다. 

 

홍콩 정부는 이날 교통 요금 혹은 일부 관광지의 입장료를 무료로 제정하여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7.1 반환은 홍콩 현대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나 이 과정이 마냥 순조롭게 진행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영국과 중국 정부간에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 최종 결정이 이루어졌다. 

 

오늘은 홍콩의 중국 반환 과정에 있었던 막전 막후를 소개해 본다.



홍콩의 앞날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다


홍콩 반환 결정은 영국 정부의 신계 지역100년 조차권이 끝나는 1997년, 이곳을 중국 정부에 돌려주기로 한 ‘홍콩 영토 확장을 위한 협약(Convention for the Extension of Hong Kong Territory)’에 기인한다. 

 

이미 기한 없이 할양을 한 홍콩섬과 구룡 반도는 논외였다. 

 

하나 홍콩과 구룡을 점령한 채 신계 지역만을 반환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었다. 

 

이들 두 지역 역시 반환 협상의 테이블에 같이 올려지게 된 이유다.  


971년 중국은 UN에 재가입한 후 홍콩이 원래 중국의 영토였음을 천명한다. 

 

이어 홍콩을 식민지 명단에서 빼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1970년대 말, ‘홍콩 영토 확장을 위한 협약’의 종료 시점이 다가오자 홍콩 상업계에서는 이 조약의 연장 유무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1898년 홍콩영토확장조약 지도.jpg

 

한편으로 홍콩의 미래가 뜨거운 관심사로 떠오른다.


1979년 3월, 홍콩의 행정장관이었던 맥리호는 덩샤오핑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으로 날아간다.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은 맥리호를 만난 자리에서 홍콩 반환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이후 영국 정부는 중국 측에 새로운 조약 체결에 대한 압박을 가한다. 

 

내용은 영국으로 하여금 홍콩에 대한 통치권을 유지하고자 함이 골자였다. 

 

아울러 중국 정부 측에 홍콩 반환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고려를 부탁하였다.


중국과 영국의 팽팽한 입장 차 – 홍콩의 미래는?


1982년 9월,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는 중국을 방문하여 덩샤오핑을 만난다. 

 

홍콩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이 자리에서 중국 정부는 1997년에 홍콩을 반환 받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영국 측에 전달한다. 

 

그러나 대처 수상은 영국이 이후에도 홍콩에 대한 통치권을 갖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이날의 회담은 성과없이 결렬되었다. 

 

다음해 영국 대선 후 두 나라는 다시 한번 홍콩의 앞날에 대한 논제를 가지고 협상을 시작한다.


영국은 주권으로 통치권을 바꾸자는 제안을 한다. 

 

즉, 중국이 홍콩에 대한 주권을 보유하고 대신 영국은 계속 홍콩을 통치한다는 내용이었다. 

 

하나 중국은 1997년 이후 주권과 통치권을 모두 회수하겠다는 입장을 양보하지 않았다. 

 

양측의 협상은 또다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같은 해 9월, 홍콩의 경제가 요동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중영 두 나라의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며 투기자들은 미화를 대량 매도한다. 

 

이로 인해 홍콩달러의 환율이 폭락하며 시민들이 공황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사재기 현상까지 발생하는 지경에 이른다.


영국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주권으로 통치권을 바꾸자는 기존의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중국 정부에 압박을 가한다.  

 

동시에 대처 수상은 해외 언론전도 펼친다. 

 

미국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영국의 관심은 영토를 뻬앗는 것에 있지 않고 홍콩인들의 이익에 있음을 밝힌다.


1984년 4월, 쫑투위엔 등 행정 및 입법 의원들이 런던을 방문한다. 

 

목적은 홍콩인들이 어떻게 홍콩을 통치하고 민주화를 이룰 것인지에 대한 방안을 설명하고자 함이었다. 

 

하나 영국 고위층의 냉대만 당하고 만다.


이렇게 여러 차례의 교섭을 거치며 홍콩의 미래에 대한 줄다리기는 진통을 겪는다. 

 

결국 1984년 초에 이르러 영국은 1997년 후 완전히 홍콩에서 물러나는 것에 동의한다. 

 

같은 해 9월 26일, 쌍방은 ‘중영연합성명’에 서명하였다. 여기에 담긴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97년 홍콩은 중국에 반환된다. 둘째, 일국양제를 시행하며 홍콩은 홍콩인에 의해 통치된다. 

 

셋째, 홍콩 특별행정구를 설립한다. 넷째, 홍콩은 50년간 자본주의 제도를 유지한다.


이로써 홍콩의 미래에 대한 영국과 중국간의 지루한 공방은 종료되었다. 

 

다음해 5월, 중영연합연락사무소를 세워 연합성명의 실행 상황을 점검하며 정권 이양 과정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일국양제 구상의 탄생

 

덩샤오핑이 제안한 일국양제.jpg

 

반환 후 홍콩 통치 이념의 핵심이 된 일국양제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덩샤오핑은 1982년 1월에 대만 문제를 언급할 때 처음으로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 개념을 선보였다. 

 

그는 이에 앞서 대만 및 홍콩의 기자들을 만나 대만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입각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것인데, 필요에 따라 무력 사용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이다. 

 

대만은 중국의 여러 성(省) 중 하나이며 기존의 생활 방식과 제도는 유지하도록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1984년 6월, 덩샤오핑은 홍콩의 상공회가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한 발 더 나아가 일국양제로 대만과 홍콩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한다. 

 

일국양제의 적용을 기존 대만에서 홍콩으로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하나의 나라, 두 개의 제도’ 정책을 통해 홍콩의 사회와 경제가 반환후에도 장기간 기존의 제도를 유지해 번영시켜 나가도록 하겠다는 구상을 내비쳤다.


홍콩 반환이 올해로 26주년을 맞이하였으니 애초에 중국 정부가 약속한 ‘50년 기존 제도 유지’의 반환점을 돈 셈이다. 

 

남은 기간 동안 반환 전의 언약이 얼마나 충실히 이행될지 궁금하다.


참고자료:《圖解香港史》,周子峰,中華書局, 2020

 

이승권 원장.jpg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