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 거주하는 우리 교민들은 한자에 둘러쌓여 살고 있다. 거리 표지판 및 간판, 식당의 메뉴판, 책과 문서, 명함등 곳곳에 한자가 새겨져 있다. 중국어의 한자에는 번체자와 간체자가 있고 홍콩은 번체자를 쓴다는 사실은 중국어를 모르는 교민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역대 가장 많은 한자를 담고 있는 사전이 2017년 대만에서 출판된 <이체자자전(異體字字典)>으로 총 106,336자가 수록되어 있다. 원래부터 무수히 많은 것이 한자인데 그 안에서 또 다시 두가지 형태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체자 탄생의 배경 및 역사, 그리고 특징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 탄생 이후 중국 정부는 문자 개혁 업무를 담당하는 중국 문자 개혁 위원회를 설립한다. 80% 이상의 인민들이 문맹이라는 현실은 신중국을 이끌어 가야 하는 정부에게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이로 인해 1950년대 중반, 문자 개혁 방안이 발표된다. 1)문자의 간략화, 2)표준 중국어인 푸통화의 보급, 3)한자의 발음 기호인 한어 병음 방안 제정 및 보급이 문자 개혁의 3대 임무로 지정되었다.
간체자는 이런 문자 개혁의 일환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56년, 국무원은 한자 간략화 방안을 제창하였는데 한자 유형에 따라 크게 4가지로 분류하였다.
이어서1964년에 간체자를 최종 정리한 <간화자총표(簡化字總表)>를 내놓았고 1986년, 일부 조정을 거쳐 총 2235개의 간체자가 발표된다.
번체자를 간체자로 바꾸는 유형은 크게 6종류이다. 획수를 간단히 하거나(예:語=>语) 특정 부분으로 표기하는 방법(醫=>医), 새로운 형성자나 회의자로 구성하는 방법(響=>响)등을 포함하고 있다.
간체자가 탄생하면서 원래 있던 고유 한자를 부르는 용어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번체자(繁體字)’이다. 번체자는 ‘번거로운 글자체’라는 폄하의 의미가 담겨 있다. 중국에서는 현재 간체자가 공식 문자로 제정, 보급됨에 따라 번체자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출판되는 중국어 교재들 또한 간체자로 되어 있다.
간체자의 장점은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하다는데 있다. 포스코 경영 연구원에서 출간하는 친디아저널에 따르면 중국의 문맹률은1990년 22.2%, 2000년에는 9.1%까지 낮아졌다. 이는 중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9년간의 의무 교육 제도 및 간체자 보급에 기인한다.
하지만 간체자는 약점도 지니고 있다. 한자가 담고 있는 고유의 뜻을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 ‘애’자는 고유 한자에서 ‘愛’로 쓰여 중심에 ‘마음 심(心)’을 담고 있다. 즉, 마음을 담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간체자는 ‘爱’로서 ‘心’자가 빠져 있다.
중국 대륙과 싱가폴은 간체자를 , 홍콩 대만 마카오는 번체자를
중국어를 공식 언어로 쓰는 곳은 중국 외에도 홍콩, 대만, 마카오, 싱가포르이다. 공산당이 탄생시킨 간체자를 인정할 수 없었던 대만과 일국양제를 유지해 온 홍콩 및 마카오는 번체자를 사용한다. 인구의 74%가 중국계인 싱가포르는 간체자를 쓰고 있다.
필자는 한국의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할 당시 회화등 일부 수업은 번체로 된 교재를, 강독등의 수업은 간체로 쓰인 교재를 사용하여 둘 다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대만 유학 때 간체자를 배우지 않은 현지인이 외국 사람인 필자에게 간체자를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현재 홍콩 사람들과의 한국어 수업이나 그들에게 문자 메세지를 보낼 때는 번체자를 쓰고, 한국 사람들에게 표준 중국어인 푸통화를 가르칠 때는 간체자를 사용한다. 홍콩 사람들은 번체자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반면 간체자 사용에는 반감을 느낀다. 따라서 홍콩인을 상대할 때 번체를 쓰는 것은 그들에 대한 배려이자 존중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홍콩 현지 학교들의 푸통화 수업이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국어 수업, 즉 중문(中文) 과목은 원래 광동어로 진행되었으나 최근에는 푸통화로 수업하는 학교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푸통화 수업이든 중문 과목이든 문자는 간체가 아닌 번체자로 배우고 있다. 그럼 홍콩 사람들은 간체자를 모르는 걸까? 학교 교육을 통해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중국 대륙과의 잦은 교류로 인해 홍콩인들은 대체로 간체자를 이해하고 있다.
번체냐 간체냐 - 홍콩 교육계의 화두
우리 교민의 자녀들도 현지 국제 학교등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사용 한자가 번체냐 간체냐는 학교마다 다르다. 국제 학교는 간체자로 배우는 곳이 더 많다. 예전에 필자가 중국어를 가르쳤던 HKIS(홍콩 국제 학교) 학생의 경우, 같은 내용을 번체 버전과 간체 버전의 두 교재로 배우고 있었다.
현재 홍콩은 번체자를 쓰고 있지만 일국양제의 보장 기한인 2047년이 지나면 문자 사용 방안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튄문에 위치한 해로우 국제학교(Harrow International school)의 경우 2019년부터 중국어 교육 문자를 간체로 전환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학교측은 2047년 이후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금도 홍콩 교육계에서는 간체자 보급에 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간체냐 번체냐는 앞으로 홍콩 교육계, 더 나아가 홍콩 사회를 달굴 주요 화두로 논의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