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1941년 12월 25일, 일본에 항복 크리스마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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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권 원장의 생활칼럼] 1941년 12월 25일, 일본에 항복 크리스마스의 비극

 
 
제 2차 세계대전 중 발생한 일본의 진주만 습격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이 역사적 사건이 일본의 홍콩 침공과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 또한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번 칼럼에서는 약 80년전 크리스마스에 발생한 홍콩 역사의 비극을 다뤄 보려 한다. 

1940년 이후 홍콩은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국 대륙에 군수 물자를 공급하는 주요 통로였다. 이는 곧 일본에게 눈엣가시로 작용하였다. 대동아전쟁의 계획을 수립한 일본군은 홍콩과 말레이지아, 미국 진주만을 동시에 습격하려는 작전을 준비한다.  

이런 일본의 심상치 않은 동향을 주시하던 영국이었지만 이들의 주요 병력은 유럽의 전쟁터에 집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영국으로서는 홍콩에 지원할 군사적 여력이 없던 상태였다. 

또한 연합국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의회의 반대로 홍콩에 대한 지원 계획을 접어야 했다. 결국 영국 및 미국의 동맹국인 캐나다가 이들을 대신하여 1941년 11월 16일, 2000여 명의 군대를 홍콩에 파병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도 일본의 야욕을 막지는 못하였다. 이미 일본은 오랜 기간 동안 홍콩 침공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1년 2월과 7월에 각각 정찰기와 인원을 홍콩에 파견, 현지 답사를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구룡을 침략 후 홍콩섬 북부를 공략한다는 전략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홍콩 침공을 위해 준비된 일본군은 6만에 달했다. 이에 맞서는 홍콩의 병력은 2천명의 캐나다군, 6천명의 의용군, 그리고 인도군 및 영국군 6천여명, 후방 지원군 1만 3천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진주만 습격과 동시에 이루어진 일본의 홍콩 침공

일본의 대동아전쟁 중 홍콩 침공은 작전 C, 말레이지아는 작전 E, 진주만 습격은 작전 Z로 명명되어 동시에 이루어진다. 1941년 12월 5일, 일본의 6만군이 션젼 강기슭에 집결된 후 8일 오전 8시에 36대의 전투기가 타이탁 공항을 폭격하며 침공이 시작된다. 

공항은 곧 통제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일본군은 연이어 삼수이포와 옹쉰챠우의 포병 기지에 폭격을 가한다. 

당일 저녁, 곳곳이 혼란해진 상황하에서 정유소 및 식량 창고가 불에 타고 당시 구룡반도에서 가장 높은 페닌쉴라 호텔에 일본의 욱일기가 걸리게 된다. 

캐나다군의 존슨 지휘관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싱가폴에 주둔중이던 주력 함대 프린스 웨일스와 리펄스호가 일본군의 습격으로 침몰, 파병 지원에 대한 기대마저 가라앉아 버린다. 결국 13일에 이르러 영국군은 삼수이포, 침사추이와 레이유문에서 각각 홍콩 섬으로 철수를 단행한다.


처칠 “하루만 더 버텨라!”

구룡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이후 홍콩섬을 향해 끊임없이 폭격을 가하며 공격을 퍼부었다. 요즘도 이따금씩 완차이, 코스웨이 베이등의 공사 현장에서 발견되는 포탄 중 일부는 당시 맹렬한 폭격의 잔재일 것이다. 

18일 저녁, 포염으로 뒤덮힌 홍콩섬에 일본의 제 228, 229, 230연대 총 8천명의 병력이 타이쿠 선착장(지금의 타이쿠싱 지역), 노스 포인트 정유 창고에 상륙한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20일에는 홍콩 최대의 용수량을 지닌 타이탐 저수지를 점령한 후 이 섬의 수로 공급을 끊어버린다. 23일에는 3일간 버티던 리펄스베이 호텔 기지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며 영국군은 최후의 보루인 스탠리로 후퇴하기에 이른다.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워싱턴에서 열린 최고위급 회담에 참석중이었다. 홍콩의 긴박한 상황을 듣게 된 처칠은 “끝까지 버텨라! 한 치의 땅도 뺏기지 말고 하루만 더 버텨라. 그럼 연합군의 도움을 얻을 것이고 그대들은 후세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라고 독려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영국군 삼군사령관인 몰트바이 장군은 홍콩 총독 마크 영에게 전세가 기울었음을 알린다. 아울러 더 이상의 전쟁은 희생자만 늘어나게 될 것이기에 항복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처칠 수상으로부터 끝까지 버티라는 전갈을 받은 마크 영 총독은 몰트바이 장군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들은 우울함과 불안감에 휩싸인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며 다음날 성탄절을 맞이한다.

일본군은 궁지에 몰린 영국 식민지 정부에 마지막으로 투항을 권고한다. 그러나 이것이 거절당하자 홍콩섬 곳곳에 소나기같은 폭격을 퍼 붓는다. 곳곳에서 연락이 두절되며 버티기에 한계를 느낀 영국 수뇌부는 결국 25일 오후에 투항을 결정한다.  

저녁 6시, 몰트바이 장군과 마크 영 총독은 일본의 임시 지휘부로 사용된 구룡의 페닌쉴라 호텔에 도착한다. 이들은 호텔 3층에서 투항 문서에 사인하며 18일간 이어진 전쟁의 끝을 알린다. 이와함께 홍콩은 3년 8개월간의 일본 통치하에 또다른 역사의 운명을 겪게 된다.


 
일본 통치로 피폐해진 홍콩인들의 생활
 

홍콩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식민지 정부가 영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라 특별한 의미가 없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이 한참이던 일본은 홍콩을 군수품 및 식량 조달을 위한 공급지로 이용하면서 현지인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하였다. 

또한 곳곳에서 양민 학살, 강간등이 이루어지며 결국 홍콩인들의 대규모 엑소더스가 이루어진다. 기록에 의하면 1942년 2월 4일까지 46만명이 중국 대륙으로 피난을 갔는데 1941년 홍콩 인구가 160만이었던 바, 약 30%에 가까운 현지인들이 빠져 나간 것이었다. 

1941년 12월 25일은 영국의 식민지 정부 및 홍콩 사람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크리스마스였다.  
 
 
참고문헌: 《香港史100件大事》,蔡思行著,中華書局,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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