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東은 20세기 초 지금의 자딘회사의 마이빤으로 자딘(이화양행)을 위해 일하고 자딘과 함께 돈도 많이 벌어 당시 중국인 갑부로서 인정받아 금역지역에 특별히 거주가 허락되었다고 하며 일부에서는 그 자신이 영국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로 반쪽 백인으로 인정받아 피크의 백인거주지역에 자리잡은 것이 허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호퉁의 아버지인 영국인은 당시 총독부의 고위 관리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런던에 있던 영국 식민성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과 달리 식민지 관리가 현지인과 결혼을 한다든지 현지처를 두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켜 만일 이러한 사실이 본국정부에 알려지면 곧바로 소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何東은 아버지가 누군 지도 모르게 되고 何仕文이란 이름을 갖고있던 어머니의 성을 따서 何씨가 되었으며 영국인 아버지가 아시아(東쪽)에서 얻은 아이라는 의미로 何東이란 이름을 얻어 중국인 행세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차츰 자라면서 중국인보다 서양인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되자 비밀이 탄로날 뻔하였다는 데 그럴 때마다 주변사람들에게 중국 동북지방의 만주인이라고 속였다고 한다. 당시 홍콩의 중국인은 만주인을 본적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피크의 골목골목을 누벼보면 옛날 식민지 스타일의 건축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곳을 볼 수 있다. 지금도 피크의 집들은 공급이 제한되어 있어 기존 주택의 가격도 비싸고 賣物이 거의 없어 피크에 집을 갖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196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이 한창일 때 피크에도 매물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造反有利라는 구호로 중국대륙을 휩쓴 홍위병들이 홍콩에서도 밤낮없이 지금의 차이나 클럽이 들어있는 옛 중국은행 건물 앞에 모여 "모택동 어록"의 붉은 책자를 흔들면서 영국인 등 외국인 제국주의자는 물러가라고 데모할 때였다. 홍위병 활동이 심각하여 홍콩경찰도 제대로 막지 못하여 홍콩의 치안상태가 극도 혼란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홍콩을 떠나는 외국인이 계속 늘어났다. 홍콩의 외국인들은 홍위병들이 홍콩을 점령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사실 홍콩과 비슷한 처지의 마카오는 당시 이미 홍위병 수중에 있었다고 하니 이런 걱정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때에 피크 중의 피크라고 볼 수 있는 Haystack에 아름다운 식민지 풍의 건물이 헐값에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빅토리아 피크의 넥크레이스와 같은 Harlech로드와 Lugard로드가 만나는 古風있는 피크 카페에서 다시 더 산 쪽으로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피크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연결하는 마운트 오스틴 로드를 따라 오르면 오른쪽으로 과거 총독부 고급관리의 집단주택이 있고, 조금 더 오르면 왼쪽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귀부인 품위를 갖추고 애버딘 쪽을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와이트 하우스를 만날 수 있다. 이 기품 있는 저택이 당시 헐값에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 저택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표지가 있다. 일장기이다. 일장기가 남중국해를 바라보면서 펄럭이고 있다. 어릴 때 읽은 유치환의 "깃발"이라는 詩가 연상된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1960년대 중국대륙이 문화 혁명이라는 홍역을 치루고 있고 홍콩도 크게 전염되어 있는 혼란기에 당시 홍콩주재 일본 총영사 A씨는 중국전문가였다고 한다. 그는 외무성 입부 후 중국어 전문가로 上海에서 중국어를 연수하였다고 하며 전쟁 전에는 上海의 일본영사로서 중.일간의 비밀회담에 통역으로 참가하는 등 나름대로 일본외무성이 갖고 있는 중국 전문가의 한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는 당시 홍콩에서 만연되고 있는 혼란은 그 심각성이 홍콩의 생명을 빼앗아 갈 중병은 아니고 일과성의 피부병정도로 가볍게 보고 있었다.
중국문화혁명의 소용돌이가 홍콩을 휩쓸고 있어 많은 외국인들은 패닉에 빠져 홍콩 탈출 분위기였지만 A 총영사의 시각은 중국 정부가 홍콩을 이런 식으로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 대륙을 통일한 후 마음만 먹으면 홍콩도 무력으로 접수할 수 있었지만 홍콩의 중요성 때문에 홍콩을 살려왔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사람들을 위시하여 외국인들은 안전을 위해 홍콩철수를 결정하고 홍콩에서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헐값이라도 팔아서 현금화하고자 했다. 이 때 나온 매물 Haystack저택을 "A" 총영사가 장래 일본의 외교를 위해 구입해 둘 것을 결심하고 본국 정부를 설득, 예산을 따내어 오늘날 피크 노른자위에 붉은 태양기를 펄럭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홍콩의 지식인은 피크의 Haystack에 있는 일본 총영사 관저는 1941년 12월 일본이 홍콩을 점령하면서 마운트 카메룬(금마윤산)에 세웠던 일본의 충혼탑 이래 두 번째로 피크에 갖고 있는 일본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마운트 카메룬의 충혼탑은 볼품 사나운 거대한 콘크리트 말뚝 같아서 풍수 지리적으로 당시 100년간 홍콩에 뿌리를 내린 영국의 맥을 끊는 모양이었다고 전한다. 전쟁이 끝난 1947년, 충혼탑은 폭파되어 카메룬 정상은 옛 모습을 회복하여 지금은 그러한 일본의 충혼탑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르게 되었다. 카메룬 산에 사라진 일본의 상징이 위치를 옮겨 빅토리아 피크의 Haystack의 일장기가 되어 "애수의 백로처럼" 날개를 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