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원주민 (1)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콩의 원주민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지만 영국사람들이 홍콩을 "발견" 하기 훨씬 전부터 홍콩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홍콩의 離島에 많이 보이는 마애석각 등에 비추어 6-7천년전 신석기 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지만 문헌기록으로는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의 천하를 통일 한 후 7년만에 대군을 남하시켜 홍콩 북부지역(복건, 광동, 광서등)에 살던 越족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부족(百越)을 복속 내지 더 남쪽 또는 산속으로 쫓아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북방의 漢族이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이 지역이 처음으로 한족 중심의 오늘날 중국의 일부가 된다. 그 때 산으로 쫓겨간 월족의 일부는 광서성 소수민족으로 남아있고 바다로 쫓겨간 월족은 단카족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지금도 광동성을 약자로 "월"이라는 단어를 쓰도록 통일되어 있으며 따라서 광동성의 등록 자동차 번호판에는 모두 "월"자를 달고 있다. 지금의 베트남은 월국의 남쪽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에서 중국에서는 越南으로 표기하고 있다. 베트남은 이 말의 현지발음으로 보인다. (베트남을 일부에서는 安南 이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이 베트남을 복속시켰다는 의미가 들어있어 베트남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기원전에 광주까지 내려왔던 한족이 홍콩섬과 지금의 신계까지 더 내려와 살기 시작한 것은 10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주로 바다 근처에서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어업을 부업으로 하여 살아왔다. 그러다가 만주의 여진족이 淸을 세우고 산해관을 넘어 中原을 평정하자 明은 남쪽으로 쫓겨와 南明이 되고 결국 南明마저 남중국해의 섬으로 쫓겨간다. 유명한 鄭成功등 明의 유신들이 해적이 되어 復明 滅淸의 기치로 淸정부를 괴롭히자 청은 정성공일파를 은근히 도와주는 해안의 한족을 바다에서 30리 안쪽으로 강제 이주를 시킨다. 역사에서는 遷海정책이라고도 하고 遷界라고도 부른다. 천계정책으로 10세기 이후 이곳에 살던 원주민(本地人:punti)은 고향을 등지고 내륙으로 옮겨 어려운 객지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 후 漢族 大臣들의 상소 등으로 청의 조정에서는 천계의 어려움을 이해하여 다시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도록 하는 復界를 허용하게 된다. 이때 대부분은 本地人이 다시 고향을 찾아 와서 살게되었지만 당초 비옥한 땅을 갖지 못했던 가난했던 일부 본지인은 복계가 허용됨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게되자 청조정은 떠돌이 하카(客家)족의 이주를 허용한다. 따라서 본지인은 비교적 비옥한 땅에 재 정착한 반면 하카족은 주로 곡식이 잘 자라지 않아 본지인에 의해 버려진 언덕 기슭이며 음달의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 그 후 19세기경 광동성 동쪽 및 복건성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진주 조개 채집을 위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살게되었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호콜로"라고 불리웠다. "호콜로(福로)"는 그들이 본래 살던 지역을 따서 부른 이름이다. 복건사람들이란 의미다. 나중에는 福이 鶴으로 와전되어 "鶴로" 라고도 한다. 따라서 홍콩의 원주민은 4가지로 분류된다. 농사를 주로 짓는 本地人(Punti)과 客家(Hakka), 어업에 종사하는 蛋家(Tanka) 와 鶴로(Hokkolo)가 그것이다. 이 번 주 나의 트레일은 이러한 원주민들이 사이좋게 살고 있다는 신계 북쪽의 루컹 쪽을 택했다.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KCR로 로우 못 미쳐 판링 까지 가야한다. 판링에서 남충가는 미니버스를 타면 된다. 미니버스는 KCR역 앞의 버스터미널에 줄지어있다. 미니버스는 판링-사타오콕 옛길(지금은 도로확장공사가 한창임)을 따라 가다가 우섹콕 오른편으로 꺾는다. 더 가면 중국과의 국경 검문소가 나와 일반 차량의 통행이 제한되다. 우섹콕 에서 남충까지는 호수 같은 바다를 바라다보면서 가게되는데 이 바다를 영국 사람들은 당시 그 해안을 조사했던 탐색선의 이름을 따서 Starling inlet라 하고, 중국 사람은 사타오콕해 라고 부른다. 이러한 호젓한 해안 길을 따라 달리는 미니버스는 곧 남충에 닿는다. 넓은 들(野)이 있는 남충이 홍콩 신계의 本地人의 고장이다. 홍콩의 지명에 많이 나오는 涌은 샘물이 있다는 뜻으로 샘물이 있기 때문에 마을도 형성되어 지금은 마을이란 뜻으로 통한다. 다음 주에 계속 . . .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