恨많은 沙田고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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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 지방 사람들은 풍수에 따라 배산임수, 즉 바다를 앞에 두고 산을 등지고 살면서부터 마을을 떠날 때는 앞의 바다를 건너든지 뒤쪽의 산을 넘어가야 했다. 구룡 앞 바다는 풍랑이 거칠고 해적떼가 우글거려 광주 등 큰 도시로 나갈려면 산을 넘어가는 육로를 택했다고 한다. 산을 넘을 경우 반드시 沙田고개를 넘어갔다고 하니 그 고개에 서린 恨은 짐작할 만하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주로 九龍城에 살았다고 한다. 구룡성 안에 관청도 있고 관리들이 인근 바다의 항해의 안전을 맡아 보기도하고 육지에서 바닷가로 많은 사람이 이주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각종세금을 징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고 하니 징수한 세금은 광주로 보내든지 북경으로 보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 영국사람들이 이 지역에 들어옴에 따라 九龍城의 성곽은 다시 증축되어 단단한 城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당시 성곽은 자취도 없어졌다. 이름뿐인 九龍城이다. 1940년대 초 홍콩을 점령한 일본이 성곽의 돌들을 카이탁 공항매립 확장공사에 모두 사용하였다고 한다. 구룡성의 집채만한 성곽돌이 카이탁 바다 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는 셈이다. 홍콩 섬에서 구룡을 바라보면 700-800m의 산들이 병풍처럼 쳐져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터널도 없을테고 주로 북상길은 고개를 넘어야 했을 것이다. 구룡의 관리가 징수한 세금 등 공물을 말에 싣고 넘어갔다는 고개가 바로 沙田고개다. 사틴 고개를 넘어서면 지금의 馬料水 항으로 나와서 배로 옮겨 우카우탕(팟센령 근처) 근처까지 간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푸로버 코브 저수지로 배가 다닐 수 없다) 우카우탕 근처에서 다시 육로이동을 거쳐 미르베이에서 배로 바다를 건너 사토우각에서 육로로 광주까지 간다고 한다. 중국의 수도가 지금의 서안(장안), 낙양, 개봉 등으로 위하(渭河)와 황하가 연결되는 당송시대에는 소관에서 장사까지 나가서 그곳에서 배로 무한까지 가고 다시 무한에서 한수를 거슬러 올라 진령 산맥을 넘어 장안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명조 이후(명.청)에는 수도가 지금의 북경이 됨에 따라 소관에서 강서성 남창까지 나갔다. 그 곳에서 경강을 따라 九江까지 나가고 다시 양쯔강을 따라 남하 남경을 지난 후 운하를 따라 북상하여 북경까지 갔다고 한다. 한달 이상 걸리는 길이었지만 수도북경에서 수 천리 떨어진 沙田쌀이 황제의 수랏상에 오르는 貢米였다고 한다. 그래서 쌀 하면 沙田쌀이 지금도 알아준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沙田에는 쌀 나무 대신 아파트군이 빽빽히 들어서 상전벽해의 시대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沙田을 직역하면 모래밭인데 모래밭에 황제가 드실 좋은 쌀이 나왔다니 믿기 어렵지만 이름보다 내용을 찾는 沙田농부들의 고집으로 이름을 美化하여 좋은 글자로 갈아 끼우는 유행에도 불구하고 옛 이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설도 있고, 이 곳 쌀 때문에 貢米의 자격을 잃은 타 지역 사람들이 질시하여 황제에게 아뢰길 그쪽 쌀은 모래밭에서 생산되어 좋은 쌀이 아니라고 고자질하였다는데 황제는 "모래밭(沙田)의 良米"라하여 재미있는 地名을 바꾸지 말 것을 지시하여 지금까지 沙田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설도 있다. 하여튼 沙田 고갯길은 예사 고갯길이 아니고 역사의 街道 임에 틀림없다. 이번 주 나의 트레일은 이러한 역사배경을 가진 사틴 고갯길로 올라보는 것이다. 九龍城을 출발, 사틴고개를 넘어 사틴으로 내려가는 트레일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 격동기를 맞으면서, 중국 국공내전 이후 제 2의 이민물결이 홍콩으로 몰아치고 불법 이민자들은 구룡반도, 홍콩섬 할 것 없이 산 속 곳곳에 달동네를 지었다고 한다. 전기며 물이 들어갈리 없다. 여름이면 전염병이 만연되어 주택문제가 홍콩정청의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였다고 한다. 이때 홍콩정청은 사틴 강(城門河)을 준설, 직강 공사를 함에 따라 이른바 강변하천 부지를 대거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그곳에 부동산 개발업자 신흥기, 신세계, 장강실업 등을 모두 참여시켜 경쟁적으로 아파트를 짓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널찍한 부지 일부를 떼 내어 시민위락시설로 공원도 만들고 제 2의 경마장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KCR을 강화하여 사틴의 교통도 한결 좋도록 만들었다. 이른바 사틴 신도시가 생긴 것이다. (다음 호에서 계속....)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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