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本家 : 廣州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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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本家 : 廣州 (2)

國際무역항 - 廣州 (gateway to China) 옛날에는 범선이 江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내륙과 만나고 江을 낀 내륙에는 항구가 있는데 중국지도를 자세히 보면 강이 끼여있는 곳이 남쪽으로는 광주가 있고 동쪽으로는 양쯔강 河口인 上海가 있다.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오는 뱃길은 월남해안을 따라 해남도를 지나 곧바로 주강을 따라 광주로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인 무역선의 코스(sea lane)였다. 그래서 옛날부터 광주는 자연스럽게 인도, 이슬람, 동남아 등과의 南海무역의 中心이 되었다. 7세기 唐朝에 와서는 중국전체가 외부세계에 개방되었으므로 唐의 큰 도시가 국제화되었다고 한다. 특히 北으로는 長安, 南으로는 廣州가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전한다. 당시 광주에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선박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인도상인의 내왕이 많아 인도의 절이 3개나 있었다고 한다. 唐末에 혼란기가 왔는데 특히 黃巢의 난이 당의 혼란기를 더욱 부채질 하였다. 당시 唐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신라인 최치원이 討黃巢檄文을 써서 유명한 황소의 난도 주목적은 국제도시로서 산물이 풍부하고 부가 집중되어 있는 廣州를 욕심낸 데 있었다는 설이 있다. 중국 역사상 광주만큼 무역항으로서 오랫동안 富를 누려온 도시는 없었다. 지금 중국에서 무역항으로 크게 알려져 있는 곳은 그 역사가 길어야 150년 정도이다. 샤믄(아모이) 上海, 천진 등 무역항이 모두 아편전쟁에서 패한 淸國이 전승국 영국의 요구에 의해 부득이 개항시킨 항구였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광주는 秦이후 오늘날까지 변함없는 무역항이면서 양쯔강 이남의 제일 큰 항구도시다. 또한 주강의 상류인 東江, 北江, 西江이 만나는 광주는 産物이 풍부하여 食在廣州라는 말은 이때부터 나왔다고 한다. 영국이 홍콩섬에 이어 카우롱(九龍)을 병합하고서 Kowloon Canton Railroad(KCR)를 재빨리 부설한 것도 광주와의 산업적 연결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때부터 Hong Kong은 shop이요 광주(광동성)는 shop에 진열할 상품을 공급하는 공급처(공장)로서 이른바 ‘Front Shop, Back Factory' 구조로 되었으며 이 구조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홍콩에서 광주까지 열차든 고속버스든 도착하는 곳이 광주의 중심지인 越秀공원 근처가 된다. 월수공원은 과거 광주의 背山에 해당된 야산을 공원화 한 것으로 공원의 제일 높은 곳에는 5층이나 되는 鎭海樓가 솟아있다. 鎭海는 물(바다 또는 강)을 평정한다는 뜻으로 광주가 무역항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抵抗(烈士)의 땅 - 홍수전, 손문 그리고 모택동 中國에서 양쯔강, 황하에 이어 3번째로 큰 珠江의 연원이 되고 있는 五嶺산맥은 워낙 높아 중국대륙에 붙어있는 인도차이나 반도와 한반도 다음으로 외부세력의 침입이 용이하지 않아 지리적으로도 독립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역사적으로 중국 내 타 왕조의 망명정부가 많이 섰던 곳이기도 하다. 南宋 최후의 황제가 광주의 남쪽(지금의 홍콩 신계)으로 도망 와서 宋의 명맥을 유지코자 한 것, 明朝가 만주족에 쫓겨 남쪽으로 도망 왔다가 최후에는 이 지역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였고 결국 吳三桂 등 청에 복속한 明의 장군들에 의해 진압된 곳도 이 지역이다. 청 말기에는 광주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花현에서 홍수전의 太平천국의 난이 일어났고 60여 년 후 손문의 신해혁명의 근거지가 된 곳도 이곳이다. 손문은 광주시에서 남으로 70km 떨어진 香山, 지금의 中山에서 출생하여 홍콩의 中央書院(Queen's College)을 졸업하고 한 때 광주의 박제의 학교에서 수학하였다가 그 후 지금의 홍콩의과대학전신인 홍콩의 西醫書院을 졸업, 마카오에서 개업하였던 완전 광주인이었다. 그는 고향 광주에서 3번에 걸쳐 淸조정에 대항 무장봉기를 감행하였다. 1895년 10월 광주에서 1차 무장봉기를 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1900년 10월 광동성 동쪽 惠州에서 제2차 봉기를 하였으나 보급 난으로 다시 실패하였다. 1911(신해년)년 3월, 그는 외국에 있으면서 黃興을 시켜 제3차 봉기를 하였으나 혁명당 정예를 대거 희생시키고 또 실패하였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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