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땅 빌린 시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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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의 난은 주로 외국인의 거주가 늘기 시작하는 연안지방에 극성을 부린다. 이곳에 있는 외국인과 개방적 중국인이 의화단원(boxer)의 공격의 대상이 된다. 많은 외국인이 그 등살을 견디지 못하고 안전한 홍콩으로 옮기게 된다. 또한 재산을 많이 가진 외국 지향적인 중국인들도 자신들의 안전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자유항인 홍콩으로 이주하게 된다. 1898년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청일전쟁)에서 패전함에 따라 빈사 상태에 빠진다. 이 때를 놓칠세라 일본과 유럽 열강들은 또 다시 중국 나누어 먹기에 더욱 열을 올린다. 영국도 이에 빠지지 않고 중국으로부터 홍콩 인근의 광활한 땅(지금의 신계)을 99년간 조차하는 조건으로 받아냄에 따라 홍콩의 땅 넓이가 11배로 갑자기 늘어나게 된다. 새로운 땅을 확보한 홍콩(영국)은 때마침 의화단의 난으로 어수선한 중국대륙(內地)으로부터의 개방적이고 능력있는 중국인의 이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다. 외국정부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당시 중국의 집권자인 여걸 서태후는 반 외세의 의화단을 은밀히 조정하여 의화단의 테러공격으로 외국인이 중국에 발 부치지 못하게 부추긴다. 급기야 북경의 외국공관지역을 포위케 한다. 선교사, 상인뿐 아니고 북경에 주재하는 외교관에게도 테러가 자행되었다. 북경에 주재하던 독일 공사관 공사가 백주에 피살된 것도 그 때였다. 북경의 천안문 광장의 동편 동교민항의 외국공관 지역에 거주하는 각국 외교관과 그들 가족들이 55일간 의화단원들에 포위된다. 찰톤 헤스톤과 에바 가드너가 공연 1963년 미국에서 제작된 "북경의 55일"이라는 영화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유명해졌다. 8개국 연합군이 천진에 상륙하여 북경에 진입, 의화단원을 쫓아내고 그들을 해방시킬 때까지의 의화단에 의한 55일간 포위 공격을 영웅적으로 막아낸 것이다. 8국 연합군은 이어서 북경을 완전 점령하고 서태후는 궁녀로 변장 멀리 서안까지 힘든 피난길을 나서게 된다. 滅淸혁명과 내전 - 항일지사들(제3波) 끊임없는 외세의 중국착취와 서태후의 무능과 장기집권으로 淸帝國은 결국 멸망하고 漢族에 의한 국민정부가 들어선다. 1911년(신해년) 손문에 의한 민주혁명이다. 청나라 초기 멸청복명(滅靑復明)의 기치를 내세운 明의 유신집단은 결국 250년이 지나서야 홍콩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멸청에 이르게 한다. 손문이 자신이 홍콩인근(中山) 출신으로 홍콩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홍콩을 혁명의 기지로 삼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손문의 신해혁명은 성공하였지만 그 후 원세개의 황제복귀와 급사, 그의 사후 그가 양성한 북양군벌간의 내전 그리고 장개석 국민당에 의한 북벌(군벌토벌)등 끊임없는 전쟁은 뜻 있는 많은 중국인을 홍콩으로 다시 내쫓아 보내고 있다. 1937년부터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항일 운동이 중국전대륙을 휩쓸고 있을 때 홍콩만이 중국땅에 유일하게 항일할 수 있는 보호지역(sanctuary)으로 남아 있었다. 일본의 중국침략으로 일본을 싫어하는 우국지사들이 홍콩으로 찾아들었다. 長江실업의 리카싱 회장이 중학 시절 항일 지사인 아버지와 함께 홍콩으로 넘어온 것도 그 때였다. 또한 홍콩이 섬유업을 중심으로 제조업이 시작된 때가 이 때였다. 중국內地의 공장시설이 홍콩으로 옮아오고 특히 홍콩 방직, 남해방직, 남풍방직 등 上海의 방직업체가 대거 홍콩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중국대륙은 다시 중국인의 손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다시 일본군 퇴치에 협력했던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내전이 시작된다. 1949년 공산당의 남경 점령과 국민당이 대륙에서 대만으로 쫓겨날 때까지 중국 대륙에서 총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이러한 내전을 피해 대륙의 지식인들이 다시 홍콩으로 넘어 들어왔다. 1937년에 태어난 퉁치화 행정수반이 12세 때인 1949년 上海에서 선박회사 사장이던 아버지와 함께 홍콩으로 이주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옮아가고 북경에서는 신중국이 건국되면서 중국대륙은 모처럼 총소리가 멎었다. 그것도 잠시 한국전쟁 발발과 중국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한 유엔은 서방의 대중국 무역금수 조치를 내린다. 홍콩은 대중금수조치에 따라 천정부지로 치솟은 의약품을 중심으로 하는 생필품의 밀수가 성행되었다. 한국전쟁도 휴전으로 장기화되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는 전후 복구와 전쟁특수에 따라 공업생산력이 늘기 시작한다. 홍콩도 중국대륙으로부터 값싼 노동력을 받아 중국시장을 중심으로 한 경공업중심의 공업생산력이 늘기 시작한다. 중국대륙은 모처럼 전쟁이 없는 통일국가가 건설되었음에도 자연재해와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실패 등으로 농촌이 피폐화되고 때마침 소련과도 사이가 나빠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인다. 모택동은 이러한 안팎으로의 어려움에 따른 통치책임을 지게되고 유소기, 등소평 등 실용주의자들은 實事求是의 새로운 정책으로 경제가 회복될 즈음 모택동 부인 강청을 中心으로하는 측근세력들이 학생들을 동원 劉·鄧에 대한 반격을 개시한다. 문화대혁명으로 불리워지는 이 혼란은 10년간은 계속되고 이 10년이 중국역사에서 "잃어버린 10年"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국경제는 피폐될대로 피폐되었다. 공장도 문을 닫았고 학교도 문을 닫았다. 대혼란에 대공백이었다. 화남지역의 중국인은 홍콩으로 다시 몰려들었다. 광동성 해안은 홍콩으로의 밀입국자를 위한 소형선박으로 붐볐다고 한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헤엄을 쳐서 홍콩으로 건너왔다. 홍콩에 밀입국한 대륙출신사람들은 홍콩의 야산에 임시 주택을 지어놓고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달동네(moon village)가 홍콩의 야산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도 그 때이다. 홍콩 - 거대한 용광로 홍콩은 근대 중국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중국에서 흘러나온 자양분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육지에서 홍수가 나서 강이 범람하면 강이 쓸어오는 먹이가 풍부하여 河口바다의 물고기를 살찌우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홍콩이 1970년대부터 아시아 4마리의 龍의 하나로서 발전을 해온 것도 이러한 대륙(內地)에서 건너온 값싼 인적자원과 홍콩 자본의 절묘한 접합이라고 볼 수 있다. 대륙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은 "성공"하여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뛰었다. 홍콩의 한 병원(Queen Mary)에서 의사로 근무하면서 "慕情(A many splendid thing)"이란 러브 스토리를 써서 유명해진 한수인은 홍콩은 빌린 땅(borrowed land)이고 홍콩에 사는 사람들은 언젠가 떠나야 할 빌린 시간(borrowed time)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권회복이 되고 영국이 물러간지 3년이 지난 홍콩은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극복하면서 점차 빌린 시간과 빌린 땅이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땅으로 변하고 있다. 머지않아 빅토리아 하버도 中山港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동양인이든 서양이든 출신지역에 관계없이 홍콩이란 거대한 용광로(melting pot)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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