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만의 외출
일본이 중국을 야금야금 침략하고 있었다. 1931년 9월 18일, 심양(당시 봉천)교외 柳條湖 근처 일본 관동군의 철도폭파 이후 그 사건을 수습한다면서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어서 만주국을 건설한다.
1932년 1월 28일, 上海사변을 일으키고 上海를 점령한 후,(외국 조계지 제외) 1937년 7월 7일, 북경교외 노구교에서 7·7사변을 일으켜 북경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그 해 8월 上海의 조계지를 점령하고 12월에는 남경을 점령하였다.
1937년은 영국의 죠지 6세가 등극한 해이기도 하다. 1938년 7월, 무한을 점령하고 10월에는 大亞灣에서부터 심천 및 광주를 점령한다.
1941년 12월에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 폭격과 함께 영·미에 선전포고를 한다. 심천의 일본항공대는 카이탁 영국공군기지를 기습 공격함과 함께 일본육군은 홍콩점령에 들어간다. 일본육군은 심천에서 로우를 지나 사틴을 거쳐 홍콩섬에 육박한다.
영국군의 난공불락이라고 자랑하던 "진드링커 라인"도 허무하게 무너지자 영군은 홍콩섬으로 후퇴하고 9000명의 수비군은 피크(山頂區)에서 최후의 저항을 계속한다.
이미 런던에서는 홍콩보다 싱가포르 방위에 우선을 두기로 결정한 이후였다. 홍콩의 방위가 중요하지만 싱가포르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피크의 수비군은 孤立無援상태였다. 그때가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해 크리스마스는 영국이 홍콩에서 맞이한 100번째 크리스마스였다고 한다.
영국은 東亞침략 100년만에 홍콩을 중국이 아닌 또 다른 아시아인 일본에게 넘겨주고 쫓겨난 셈이었다. 실로 100년만의 외출인 셈이다.
그 후 일본은 대동아 공영을 표방하고 아시아는 아시아인이 지켜야(?)한다면서 아시아관리에 들어갔다. 일본은 과거 유럽 열강에게 빼앗겼던 아시아의 고토를 수복한다는 것이었다.
네덜란드로부터 인도네시아를, 불란서로부터 인도차이나반도를 해방시키고 영국으로부터 미얀마를 빼앗은 일본은 인도마저 독립시키고서 인도내 反英 독립파와 손을 잡고 인도공략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일본의 시미즈(淸水)근처 후지산 산록에는 이러한 아시아제국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특수 게릴라 캠프가 있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와 미얀마의 많은 독립영웅들이 그 캠프를 거쳐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의 홍콩점령은 대동아 공영권의 첫 신호대였다.
1941년 12월 25일, 홍콩에서 가장 호화로운 페닌슐라 호텔(半島酒店)은 영국의 홍콩진출 백주년의 센테니얼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파티의 손님은 간 데 없고 불꺼진 호텔의 3층 대연회실은 촛불아래 크리스마스 캐롤이 아니라 당시 영국의 Young 홍콩총독이 일본군 사까이(酒井)사령관에게 항복문서를 읽는 눈물겨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다음 호에서 계속 ...)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