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하우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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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인의 아시아 진출 19세기에 아시아 무역에 진출하여 돈을 벌고, 지금도 아시아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출신이 많은 것 같다. 怡和洋行도 자딘회장이 고향 에딘버러 대학 후배인 James Matheson(1796∼1878)을 끌어들여 Jardine , Matheson & Co., Ltd를 만든 것도 그렇다. 언젠가 트레일 친구이기도 하며, 홍콩에 오래 산 영국사람에게 19세기초 아편전쟁 등 영국인의 중국·인도 등 아시아와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대뜸 하는 말이 영국인(English)은 아니라는 것이다. 눈이 휘둥그래진 나를 한 두 번 더 힐끔 쳐다보더니 "The Scots!" 라고 한다. 나는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아시아 무역은 역시 잉글리쉬 보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해낸 것 같다. 무역 뿐 아니라 영국의 동인도 회사 간부, 인도 및 홍콩 총독부 관리들 중에서도 정말로 순수한 잉글리쉬가 드물었다고 한다. 호주, 뉴질랜드의 초기 식민지 건설에도 그 사람들의 힘이 컸다. 지금도 스코틀랜드 사람은 영국 국내보다 외국에 많이 사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스코틀랜드 사람과 잉글리쉬는 서로 다른 인종·문화배경을 갖고 있으며 현재 일부 스코틀랜드 사람은 독립을 원하고 있다. 최근에는 북해에서 원유가 생산되면서 경제자립을 앞세워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영국에서는 소수민족(minority)으로 생활하다보면 스스로 컴플렉스를 느낄 수도 있고 잉글리쉬와 보이지 않는 차별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험이 기다리는 바다를 건너왔다는 설도 있다. 땅도, 사람도 익숙하지 않은 아시아와 무역을 하다보니까 현지인과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싸움을 하는 등 서로 원하지 않는 일도 많이 일어나게 된다. 아편전쟁만 하더라도 당초 아편은 중국에서 금수품이 아니었다. 다만 중국사람들이 과용한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특사 임칙서가 관헌을 동원하여 외국상인(洋行)들의 아편창고를 습격해 아편을 강제로 압류하여 못쓰게 만든 것은 지나친 일이었다. 그 것을 보상받으려고 하다보니 나중에 전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물론, 중국 측에서 보면 적반하장의 논리로 비칠테지만... 1980년대 포클랜드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대처 수상은 1997년이 되면 99년으로 끝나는 홍콩 신계(New Territory)의 임차기간 연장교섭을 시작하였다. 지는 해가 없다던 대영제국도 결국 스스로 지는 해가 되어 하나의 中等국가로 전락되고 말았는데 대서양의 절해고도 포크랜드 섬을 두고 아르헨티나와의 일전을 승리로 끌어내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이러한 기세를 업고 시작한 협상에도 중국의 등소평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임차기간의 연장은 커녕 1997년 7월로 홍콩섬 전체를 내 놓으라는 요구였다. 영국으로서는 혹을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인 꼴이 된 셈이다. 등소평의 민족주의적 반응에 怡和洋行이 더 놀랐다고 한다. 中國으로서는 아편으로 創業하고 아편으로 돈을 번 怡和를 그냥 둘 것 같지 않았다. 怡和는 부동산 등 일부만 홍콩에 두고 알짜기업은 버뮤다로, 싱가포르로 옮긴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홍콩의 노블하우스 怡和의 康樂大厦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둥글둥글한 船窓을 통해 빅토리아 하버를 내려다보면 150년 전 아편을 가득 싣고 캔톤으로 항해하고 있는 아편무역선 선실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무엇을 가득 실었는지 Henry Keswick(W. Jardine의 생질 손자)船長의 怡和 는 여전히 모험이 기다리는 거친 바다를 향하여, 오늘도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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