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살면서 중국문화를 접하고 보면 우리와 유사한 것이 많은 것을 발견한다. 물론 우리 문화의 일부가 중국에서 건너온 것도 있어서 그렇다고 하면 간단하지만 文化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기후라든지 생활환경 유사성에서 나타나는 것이 상당한 것 같다. 우리도 자고 나면 어른들께 문안인사로 잘 주무셨는가 묻고는 하루 세끼 식사 전후에는 반드시 식사(진지)를 드셨는가를 집중적으로 묻는다. 이것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식사시간 전후에는 반드시 "처판러 메이유"하고 인사한다. 홍콩에서는 "식조 판메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밥(飯)을 먹었느냐는 물음이다. 그만큼 하루 세끼 먹기도 어려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은 농사기법도 개발되어 적은 투자로 많은 수확을 해내기도 하여 식량 사정이 좋아졌다. 그리고 보관기술이 발달되고 무역이 자유로워서 흉년이 든 해에도 밥 먹기는 어렵지는 않다. 그래서 요즈음 인사는 "식사하셨습니까"가 아니고 "식사를 어떻게 하셨습니까"하고 묻기도 한다. 식사야 때가 되면 당연히 하는 것이지만 식사를 어떤 식으로 했느냐고 구체적으로 물어보게 될 정도로 풍부해졌다. 그러나 옛날에 중국에는 못 먹어서 굶주린 사람이 많았다.
농사라는 것은 하늘에 의지하는 산업이다. 농사는 햇볕과 관계되므로 농작물이 햇볕을 많이 받지 못하게 얻게 되면 수확이 급격히 감소한다. 중국에는 한때 메뚜기 떼가 극성스러워서 사람이 먹을 곡식을 빼앗아 갔다고 한다. 또 하나는 전쟁이다. 전쟁으로 굶어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중국 역사는 끊임없는 내전의 역사였다. 왕조가 뒤집혀지는 큰 전쟁은 아니더라도 지역마다 반란같은 소규모전쟁이 끊어지지 않았다. 전쟁도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사람을 군인으로 데려 가버리니 농토는 버려지고 상당기간 못 짓게 되니 먹을 곡식이 없을 게 뻔하였다. 전쟁 와중에 타 없어지는 곡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인지 중국 사람들은 밥알 한알 한알을 생명처럼 위했다. 중국의 어느 지역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밥알을 남기지 말라는 교육으로 밥그릇에 남기는 밥알만큼 나중에 얼굴에 곰보자국이 되어 돌아온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중국 5대 요리 : 釣魚臺요리
중국의 왕조시대에는 굶고있는 일반백성(老百姓)이 있는가 하면 지배층은 하루 세끼 먹는 데만 신경을 쓴 것 같다. 1911년 중국이 혁명을 통하여 淸朝를 멸망시킬 당시 북경의 자금성에는 300명의 황실요리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요리사들이 전국으로 흩어져서 당시 일류 식당의 주방장을 하면서 중국 요리를 발전시켜왔다. 문화란 가진 자가 여유를 부려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중국의 식문화도 황실 귀족 등 지배층을 위해 끊임없이 만들어 낸 것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중국요리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에 일반백성은 밥(米飯)에다 간단하고 짭잘한 반찬(咸菜) 1∼2개로 한 끼 식사를 끝내고 있으므로 식문화와 거리가 멀다. 淸왕조의 황실과 귀족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살던 기마민족 만주족이다. 그들의 음식은 본래 漢族의 다양한 음식과 다르다. 만주족의 음식은 간단하며 원시적(uncivilized)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족은 몽고족과 마찬가지로 초원에 살았기 때문에 음식의 재료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옮겨다니는 생활이라 음식에 대한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화꾸어얼(火鍋)"라고 하는 음식이 대표적인데 우리나라 신선로하고 맥이 통한다. 화덕에 뜨거운 물을 끓여서 그 속에 얇게 고기를 집어넣어 익혀 먹는다. 일본의 사브사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기마민족의 음식이 몽고-만주-한반도-일본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불을 직접 피우고 그 불을 쪼이면서 끓는 물 속에 고기를 담궈 익혀 먹기 때문에 겨울철 차가운 대륙성 고기압인데도 뜨거운 고기를 먹으면서 몸 안을 데우고 화롯불로써 몸밖을 따뜻하게 하기 때문이다. 청조의 건륭황제는 자금성내에서 수천명의 신하들을 모아놓고 "화꾸어얼"파티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1인용 "화꾸어얼"(hot pot) 수천개가 준비되고 모두 불을 지펴야 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우리나라 신선로처럼 가운데는 굴뚝처럼 불이 잘 지피게 되어있고 뜨거운 물(육수)을 그 주위로 담겨져 숯불에 뜨겁게 끓는다. 옆에는 주로 양고기를 얇게 썰어 놓았고 갖은 양념이 준비되어 입맛대로 육수에 익혀 먹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농경문화 유습으로 양고기보다 쇠고기가 일반화되어 신선로와 사브사브는 신선한 야채가 중심이 되었고 육류는 얇게 쓴 쇠고기이다.
청의 황실에서는 만주고유의 음식에다가 한족의 음식을 가미하여 滿漢全席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청조의 건륭황제는 자신이 변복여행을 좋아하여 지방의 괜찮은 음식은 북경으로 가지고 오게 하여 자금성내 황실에서 만들도록 하여 滿漢全席 요리의 가지수가 늘어났다고 한다. 청조가 없어진 지금 新中國에는 과거 황실음식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요리가 있다. 조어대(釣魚臺)요리다. 북경의 서쪽에 중국의 국빈관 조어대가 있다. 각국의 정상들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면 반드시 묵게되는 영빈관이다. 우리나라도 1992년 수교이래 역대대통령 내외께서 묵었던 곳이다. 그곳에서 만들어져 정상 등 국빈들에게 제공되는 요리는 중국의 4대 요리 어느 곳에서도 속하지 않는다. 그 4대요리의 좋을 것을 뽑아다가 새로이 만들어낸 특색있는 요리다. 그래서 조어대 요리를 맛본 사람들은 중국에는 5대 요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4대 요리에다 조어대 국빈요리가 포함된 것이다. 북경시내의 살벌한 분위기와 달리 수림이 울창한 조어대 경내에서 음식을 담아내는 容器마저 중국적으로 특이한데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음식을 맛보았다면 중국음식의 정수를 일단 맛보았다고 해도 虛言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