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의 마지막 황제와 카가미(鏡)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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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의 마지막 황제와 카가미(鏡) 下

“라스트 엠퍼러” 일본의 관동군이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의 황제는 부의(溥儀)였다. 부의는 13년간 만주국의 황제였고 만주국은 中日전쟁 당시 일본군의 보급기지 역할을 하였다. 부의가 전후 東京 전범재판에 증인으로 불려나왔던 것은 일본 전통의 神社를 통해 철저한 친일행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그는 만주국의 수도 장춘(당시 新京) 시내 자신의 궁전 내에 신사(神廟)를 지었다. 그뿐 아니라 神社를 각별히 아꼈는데, 그 신사의 청동거울은 伊勢神宮과 맞먹는 크기인 직경 30cm의 대형거울이다. 이는 부의의 요청으로 특별제작된 거울이었다고 한다. 부의는 잘 알려진 대로 청의 마지막 황제이다. 1908년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의 신해혁명으로 淸國이 멸망하기 3년 전, 당시 두 살이었던 부의가 지금 북경의 자금성에서 황제로 등극한다. 청의 마지막 황제, 宣統帝가 된 것이다. 그 후 신해혁명으로 청이 망했으니 부의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었지만 국민당 정부로부터 거주지를 자금성내로 제한을 받으며 만주족을 중심으로 하는 측근으로부터는 황제대우를 받았다. 그후 그는 자금성에서 결혼도 한다. 그러나 18세 되던 해, 군벌들에 의해 자금성에서 추방되어 일시 자금성에 인접한 일본 공사관의 식객노릇을 하였다. 그는 일본 공사관 너머로 보이는 황금기와의 자금성을 보고 자신이 반드시 다시 청의 황제가 되어 청조를 재건하리라 결심하였다. 그는 그 후 천진의 日本 租界에서 카페 등에서 노래나 부르고 황제로서의 꿈은 잊은 듯 보였다. 그러나 어느 날 그를 찾아온 일본군 장교가 있었다. 그때가 1931년 11월초였다. 그 해 9.18 발발된 만주사변이 있은 후 1개월 반 만이다. 일본군 장교는 도이하라(土肥原) 大佐로 관동군 봉천(지금의 심양) 특무기관장이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얻은 만주지역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군대, 중국 산해관 동편을 지킨다는 의미로 특별히 조직된 관동군은 만주전체를 점령하였고 만주에 일본괴뢰제국을 필요로 하였다. 이를 위해 이미 사라진 만주족의 제국을 다시 세우고 청조 황실의 먼 후손이라도 찾아내어 괴뢰황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다행히 짧게나마 황제를 역임한 만주청년 부의가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여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부의의 마음속 깊이 묻어둔 淸朝 재건의 꿈이 실현되는 기회가 온 것이다. 장롱 속에 감추어둔 龍袍를 꺼내보았다. 1932년 3월1일 “王道樂土”의 슬로건으로 만주국이 당시 新京(지금의 長春)에서 건국되고 부의는 만주국 執政이 되었고, 2년 후 약속대로 황제로 즉위한다. 5만의 관동군이 열병한 가운데 일본인 관리로 이루어진 백성없는 제국의 황제였다. 그렇지만 부의에게는 꿈이 실현되는 날이었다. 누르하치 이후 청조 250년의 역사가 자신의 代에 와서 멸망된 것을 씻을 수 없는 한으로 여기던 부의가 그 날 황금빛깔의 龍袍를 입고 다시 황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부의는 관동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만주국의 국방과 치안을 관동군에 위임하고 일본인을 중앙과 지방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溥儀와 카가미 1935년 부의는 관동군의 주선으로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다. 부의는 당시 군국주의가 극치를 이루고 있던 일본에서 쇼와천황(昭和天皇)이 살아있는 神인 것을 알았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神社라고 보았다. 1940년 6월, 두 번째 일본을 방문한 부의는 일본 천황에게 만주국 新京의 왕궁에 신사를 짓겠다고 하면서 황실의 “카가미”를 요청했다. 그러나 궁내청의 반대로 황실의 “카가미”는 반출되지 않고 직경 30cm의 특별 “카가미”를 제작받아 귀국한다. 귀국한 지 한달후 부의는 만주국의 궁전에 神社(神廟)를 완성하고 “카가미”를 봉안하는 鎭座祭를 올렸다. 관동군 사령부는 부의가 명실상부하게 日滿一體가 되었다고 만족하였다. 그러나 부의의 생각은 新京의 神社를 통해 자신을 보호받고 싶은 것이었다. 부의는 無所不爲의 관동군사령부, 주만주국 일본대사관 등의 등살을 神社의 “카가미”를 통해 피하고 싶었다. “카가미”가 일본 황실을 상징한다면 자신이 “카가미”를 모시고 있으니 자신이 관동군보다 일본 황실과 가깝다는 뜻도 된다. 어찌보면 새로운 “카가미”로 일본권력을 제압해 보려는 이른바 以夷制夷의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1941년 겨울, 일본은 대담하게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6개월 만에 남태평양의 미드웨이 전투에서 패배, 전황은 계속 역전된다. 1945년 8월 9일 일본과 불가침 중립조약을 맺고 있던 스탈린이 개전을 선언하고 극동의 소련군이 파죽지세로 만주국으로 쳐들어왔다. 8월 12일 부의는 신사의 “카가미”를 귀중히 싸서 짐속에 넣어 압록강 근처 광산마을 大栗子에 도착한다. 그러나 부의는 만주국 황제에서 퇴위, 8월 19일 소련군에게 잡혀 시베리아로 끌려간다. 부의가 애지중지하던 “카가미”는 그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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