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비자
리투아니아로 쫓겨온 유대인들은 일본영사관에 통과비자 신청을 하였다. 당시 독일의 눈치를 보고있는 유럽의 많은 나라가 유대인에게 통과비자를 주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멀리 극동의 일본은 유럽의 이러한 인종적 문제에 무관심할 것으로 생각, 통과비자가 나올 것으로 믿었는지 모른다. 스기하라 영사가 접수한 비자는 이러한 유대인들이 일본을 통과하여 제 3국으로 가는데 필요한 것이었다.
어찌보면 나치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출국허가와 같은 것이다. 스기하라 영사는 일단 본국정부(외무성)에 청훈하였다. 일찌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통과비자를 요청한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스기하라 영사의 청훈에대해 동경의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회신이 왔다. 스기하라 영사는 영사관 로비에서 마침 비자신청을 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중이었다.
암호전문은 급히 풀렸다. 답은 간단했다. “No"였다. 스기하라 영사는 이해가 되지않았다. 일본에서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후쿠이현의 "츠루가"항에서 하루 이틀밤 묵었다가 남미, 또는 제 3국으로 가는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이 전부인데 "No"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주축국의 하나인 일본으로서도 동맹국인 독일의 반유대인 정책이 싫어 떠나는 유대인의 출국을 도와준다는 것은 독일정부의 불만을 살 수가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잘 알리 없는 스기하라 영사는 처음에는 이해를 하지못했다. 그러나 차츰 군국주의 일본이 독일과 함께 전쟁에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과 독일이 전쟁과 함께 죄없는 유대인을 대량학살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당시 나치독일이 유럽의 유대인은 씨를 말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래서 정보가 빠른, 사회적으로 유명한 유대인들은 이미 미국등지로 출국하고 독일에 남아있는 유대인은 그러한 고급정보를 접할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스기하라 영사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영사관 주위에는 비자신청을 한 사람들과 비자신청을 받아준다는 소문에 인근국에서 몰려온 유대인들로 붐벼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던 영사관 주변이 갑자기 많은 사람들로 소란하였다. 일부는 체재할 호텔비가 없어 길거리에 천막을 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스기하라 영사의 고민은 깊어갔다. 비자신청을 한 그들에게 본국정부의 "No"라는 훈령을 알리면서 ”Sorry"하고 비자를 거부해 버리면 간단하다. 그리고 계속 떠나지 않을 경우, 주재국 경찰에 연락하면 즉시 강제해산 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이 따뜻한 일본의 영사 스기하라는 결국 유럽을 떠나지 못하는 그들의 운명을 생각해 보았다. 그들이 갈 곳은 죽음에 이르는 수용소가 아니겠는가. 스기하라는 고민에 빠져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부인과도 몇 번이고 상의를 하였다. 부인도 창밖으로 보이는 철없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울수 없었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이 그렇게도 죄가 된단 말인가. 부인이 적극적으로 비자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부가 거부하였지만 현지 판단으로 비자를 주어도 큰 문제가 되지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마침내 스기하라 영사는 결단을 내렸다.
"츠루가"(敦賀)에 모이는 유대인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비자를 준다는 소문이 인근국 유대인에게 전달되었다. 이미 포기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살 길이 생긴 셈이다. 모두 가사를 정리하고 가족단위로 리투아니아로 밀려왔다.
영사관 앞에는 그야말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놀란 것은 독일정부였다. 독일은 일본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고 소련정부에도 리투아니아로 하여금 비자신청을 위해 온 유대인들은 강제해산 시키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비자를 주는 데는 따로 근무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계속적으로 몰려오는 유대인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스기하라 영사는 비자에 사인하느라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였다. 소련의 압력을 받은 리투아니아정부는 카와나스 영사관 폐쇄를 결정하고 스기하라 영사를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 출국통보를 받은 스기하라는 더욱 바빠졌다. 더많은 유대인들이 아우성이었다. 수천명이 비자를 받았음에도 또 수천명이 밖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비자란에 스탬프 찍고 사인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였다. 스기하라 부인도 거들었다. 그들은 출국일자를 통보받고도 이삿짐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
드디어 마지막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스기하라 가족이 떠날 카와나스 기차역에 진을 치고 있었다. 역에서 스기하라 가족을 본 유대인들은 모두 여권을 내밀면서 비자를 요청하였다. 기차를 타고 객차 창문을 통해서 밀려오는 여권에도 일일이 사인을 하였다. 드디어 기차는 출발하였다. 그렇게해서 6,000여명의 유대인들이 비자를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일본국의 통과비자에 의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동해를 건너 일본 후쿠이현의 “츠루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중국(상해), 또는 남미로 가는 배를 탔다. 스기하라씨는 그후 체코의 프라하, 루마니아 부카레스 公館에서 근무를 계속하다가 1945 終?과 함께 일시 소련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가 1947년 귀국, 외무성을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동경에서 가까운 카마쿠라(鎌倉)에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영웅 : 스기하라
그런후 1968년, 일단의 신생국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기하라를 카마쿠라까지 찾아왔다. 그들은 스기하라가 살아있는 것을 반가워 하였다. 그들이야말로 스기하라가 발급한 생명의 비자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었다. “미스터 스기하라, 우리들은 당신의 행위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 헤어진 옛날 여권을 들고 생명의 은인 스기하라를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
그들을 살린 비자에는 “스기하라”라는 서명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이스라엘정부는 텔아비브에 “스기하라”路를 만들었다. 그리고 개통식에 스기하라 부부를 초청하였다. 스기하라씨는 건강이 좋지않아 가지 못하고 부인이 딸과 함께 찾아갔다고 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스기하라 부인을 위해 대대적으로 환영행사를 하였다.
스기하라 영사에의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의 자손까지 합치면 수만명이 된다고 한다. 오늘도 그들은 독일의 잔혹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도록 한 스기하라씨를 잊지 못한다. 일본제국주의의 한 외교관이었던 “스기하라” 영사는 제국 일본정부의 외교사에 人道의 외교관으로 찬란한 한 페이지를 남기게 되었다. “쉰들러 리스트”에 의해 스기하라 영사는 더욱 유명해졌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멸종시키고자 한 나치 독일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 일본제국 정부의 한 외교관의 “작은 반란”에 의해 목숨을 건진 기적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있다. 세계에 흩어져 근무하는 대부분의 일본 외교관은 스기하라 영사의 목숨을 건 인도주의의 승리를 높이 사고있을 것이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