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 가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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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4월은 신학기가 시작되고 신입사원이 결정되는 달이다. 말하자면 자연과 함께 인생의 봄도 시작된다. 북반구에서 봄이라면 꽃이다. 봄의 꽃이라면 나라마다 틀리지만 일본에서는 뭐라해도 "사쿠라"다. 사쿠라가 없는 봄은 상상하기 힘들다. 일본에서 자생하는 사쿠라는 오랫동안 일본인의 마음속에 꽃의 대명사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입학과 취직의 계절인 4월에 "사쿠라가 피었다"는 간단한 한 구절이 신입생과 신입사원의 합격소식을 알리는 전문으로 널리 애용되어 왔다. 사쿠라라 하면 문자 그대로 꽃을 본다는 "하나미(花見)"가 연상된다. 사쿠라 꽃놀이인 "하나미"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일본에서도 기록이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1,000년전 平安시대 귀족들이 사쿠라를 보고 즐기는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이후 전란에 휩쓸려 "하나미"에 대한 기록이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에도(江戶) 시대에 와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통치이념인 忠誠이 강조되며 先代의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자유로웠던 그리스도교 신앙이 탄압되고 불교와 유교가 급속히 파급된다. 유교는 3강 5륜의 철학으로 忠孝사상을 숭상하다 보니, 봄날 활짝 피었다가 빨리 져버리는 화려하기만 한 사쿠라보다 이른봄(早春)에 피는 梅花를 더욱 귀중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운데도 꽃을 피워내는 매화를 에도시대의 지배계급이었던 사무라이(侍)들이 좋아하여 사무라이들의 官舍, 또는 城에는 반드시 梅田이 있어 매화를 집단으로 심어 관상하였다. 사무라이와 우메보시(梅干) 당시 쇼군(將軍)家인 德川家는 매화를 크게 장려하여 御三家(3대 집안)로 알려진 미토(水戶), 키이(紀伊), 오와리(尾張)의 德川家에서는 대대적으로 매화를 심었다. 매화는 松竹처럼 절개의 상징이며 한겨울 꽃으로서 신비함과 그 향기로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또한 엄동의 쓰라림을 굳건히 이겨내는 꽃이다. 말하자면 괴로움과 유혹을 참아내며 主君을 위한 충성심이 투철한 사무라이의 마음에 드는 꽃이었다. 더구나 梅花는 梅實을 제공하여 一石二鳥의 효과도 있었다. 지금도 매실을 소금에 절인 매실장아찌인 "우메보시"는 일본 식품의 대명사가 되어있다. "우메보시"의 유명한 산지는 와카야마(和歌山) 지역인데 과거 이 곳이 紀伊德川家의 영지였다. 또한 이른봄, 東京에서 멀지않은 미토(水戶)의 梅園은 우메(梅)를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의 관광명소가 되고있다. 그랬던 것이 에도(江戶) 말기에 오면서 200년 이상 평화시절에 젖어 忠의 사무라이 정신도 희석되어 매화보다 화려한 사쿠라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따라서 사쿠라 "하나미"(花見)가 서민들 속에도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이 1800대에 들어와서였다고 한다. 平安시대 "하나미"는 귀족사회의 풍류로 자리매김 해오다가, 에도 時代 교통과 상업의 발달로 서민생활이 윤택해짐에 따라 꽃놀이인 "하나미"가 대유행이었다고 한다. 帝國군인과 사쿠라 그런데 이러한 낭만적이고 賞春의 대상이던 사쿠라가 明治 초기에 일본의 國花처럼 되어 사쿠라의 피고 지는 것까지 일본인의 국민기질과 비교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9세기 중반(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黑船의 도래는 250년간 평화의 노곤한 잠에 취해있는 에도의 德川 쇼군(將軍)에게 있어 잠자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제정신을 잃은 에도막부가 大名(지방의 제후)들을 소집하는 등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이자 평소 에도막부에 불만을 가진 사츠마(薩摩 : 지금의 카고시마현) 및 쵸슈(長州 : 지금의 나가사키현)측에서 어린 明治천황을 내세워 혁명을 일으킨다. 이 혁명이 성공하여 明治유신이 되었다. 명치정부는 당시 식민지 쟁탈에 血眼이 된 西歐列强들에 의해 월남(佛)이나 버마(英)처럼 아시아의 식민지가 되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기위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등 젊은이들을 서양에 유학 보내어 富國强兵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당시 아시아에서 서구列强의 선진문화를 급속히 수입, 식민지 국가의 대열을 벗어난 나라가 태국과 일본이었다. 일본은 서구문화를 배우는 것도 빨라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정책까지도 배워 오히려 식민지 쟁탈전에 나서게 된다. 일본은 제국군인으로 하여금 청(中國)과 겨루고 러시아와도 싸우게 했다. 임전하여 겁을 먹지않고 잘 싸우는 일본 제국군인에게 보여준 것이 바로 사쿠라였다. 사쿠라는 금방 무리지어 활짝 피었다가 금방 져버리는 화끈한 꽃이었다. 明治정부는 사쿠라의 피고 지는 모습을 제국군인의 기상에 맞추었다. 군인은 사쿠라처럼 활짝 피었다가 빨리 져버리듯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정신교육이었는지도 모른다. 필 때도, 질 때도, "아름다운" 사쿠라처럼 되라고 한 것이다. 어쨌든 사쿠라는 전국에 보급되고 식민지 국가에도 사쿠라를 심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일본과의 우호의 상징으로도 사쿠라가 사용되었다. 지금 일본 이외 사쿠라가 무리지어 아름답게 피고 지는 곳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이다. 워싱턴에는 "포토맥"이라는 이름의 강이 흐른다. 그 강변에 수령 90년이 되는 사쿠라가 봄철이면 장관을 이루는데 그것은 1910년대 토쿄시와 워싱턴시와의 우호관계를 깊이하기 위하여 당시 토쿄시의 오자키 시장이 워싱턴시에 기증, 식목한 것이다. 사쿠라로 상징되던 일본 군국주의도 1945.8.15 세계 제 2차대전의 종전으로 끝났다. 사쿠라의 상징성도 없어졌다.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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