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전 12월의 집단 복수극 : 추신쿠라(忠臣藏)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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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전 12월의 집단 복수극 : 추신쿠라(忠臣藏) 上

師走의 忠臣들 일본에서 12월은 점잖은 스님(師匠)도 뛰어다녀야 한다는 의미의 시와수(師走)의 달이다. 그 바쁜 달, 꼭 300년전의 12월에 47명의 무사들이 한 저택을 습격, 무방비 16명을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에서 이 사건을 일으킨 47명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가 “忠臣藏”이라는 이름으로 인구에 회자되어 12월이 되면, 일본전통 歌舞技의 단골 메뉴로 되었다가 영화, TV드라마 등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최근에는 발레로까지 표현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忠臣藏를 보지 않고서는 12월을 넘길 수 없을 정도다. 우리나라면 춘향전, 중국이라면 白蛇傳, 패왕별회 같아서, 일본에서는 삼척동자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런데, 금년 2002년은, 12월에 들어서기 전부터 忠臣藏으로 떠들썩하다. 왜냐하면, 금년이 47명의 忠臣들이 거사를 한지 꼭 30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47명의 忠臣이 주군의 원수인 키라(吉良)를 암살하는데 성공하였던 때가 300년전 1702년 12월 14일이었다(당시는 음력이나 지금은 양력으로 기념하고 있다). 장소는 지금의 東京, 당시 에도(江戶)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47명의 忠臣의 원수였던 吉良가 재조명되고 吉良의 고향에서는 名君으로 칭송되고, 오히려 그는 억울하게 인생을 마감하였다하며 吉良를 위한 300주년 忌日을 기리고 있다. 그의 고향이 바로 나고야 인근, 아이치(愛知)현의 吉良町(읍)다. 성급한 쇼군(將軍藏)의 처사 그러면 그 끔직한 집단복수극의 전말은 무엇인가. 이른바 에도성의 “忍傷사건”이라고 불리는 업무상의 다툼에서 시작된다. 때는 47명의 忠臣이 원수를 갚은 때로부터 1년 9개월전의 일이다. 즉 1701년 3월 14일 지금의 일본 효고(兵庫)현에 아코오(赤穗)라는 지방의 30대 다이묘(大名, 領主), 아사노 타쿠미노가미(淺野內匠頭)가 에도(江戶) 幕府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업무와 연결되는 人物은 키라고오즈케노스케(吉良上野介)라는 당시 60대 인물이 있었다. 吉良家는 다이묘(大名)는 아니지만, 하타모토(旗本)라는 신분으로 수백년 내려오는 전통가문으로 에도 막부내에서 외교 및 의전을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그의 고향은 지금의 아이치현이며, 당시로는 三河지방이었다. 두사람은 부자지간과 같은 연령의 차이도 있지만 신분은 大名 아사노가 높았다. 그러나 업무의 전문은 노련한 吉良측이었다. 두사람의 업무상 충돌에 젊고 성질이 급한 武骨의 아사노가 참을성을 잃고 말았다. 규정에 의하면 지금의 東京 皇居인 과거 에도막부의 쇼군(將軍)의 저택이었던 에도城내에서는 누구든 칼을 뽑을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근무하는 大名은 물론 방문객 모두 칼을 맡기거나 빈 몸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일본의 사무라이(武士)는 “카타나”라고 하는 칼을 2개 휴대한다. 즉, 긴칼(太刀)과 짧은 칼(短刀)을 각각 휴대한다. 긴칼은 물론 적을 공격할 때 사용하지만, 짧은 칼은 자신이 실수를 하여 윗분으로부터 명령을 받을 때 자신의 배를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칼(切腹用)이다. 그러나 신분이 높은 자들은 에도城에서 이 작은 칼의 휴대가 가능하였다. 두 사람의 말다툼 끝에 성질급한 아사노가 짧은 칼(와까자시라고도 한다)을 뽑았다. 그 칼이 급하게 피하는 吉良의 이마와 등에 작은 상처를 낸 것이다. 그 사건은 쇼군에게 즉시 보고되고 쇼군은 아사노에게 그 죄를 물어 하루가 지나기전에 切腹(자신의 배를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당시의 死刑제도의 일종)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나중에는 切腹뿐아니고, 아코오(赤穗)城을 반납(開城)토록 명한 것이다. 결국 아사노는 切腹하고 자신의 居城 아코오는 환수되어 아사노家는 영원히 소멸된 것이다. 그 반면에 吉良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 유 주 열 (수요저널 칼럼니스트) 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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